시무나무 아래 서른(서러운) 나그네
二十樹下三十客(이십수하삼십객)
마흔(망할) 집 가운데 쉰 밥이라
四十家中五十食(사십가중오십식)
사람으로서 일흔(이런) 일이 있는가
人間豈有七十事(인간기유칠십사)
집에 돌아가 서른(선) 밥 먹는 것보다 못하지
不如歸家三十食(불여귀가삼십식)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진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이십수하」(二十樹下)는 나그네의 서러움을 풍자한 시다. 스물, 서른, 마흔, 쉰 등 숫자의 음과 훈을 빌어서 인심을 차지게 빗댔는데 여기서 '이십수'는 정식 나무이름이 아니라 시무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경상도 토박이말로도 스물을 '시물' 혹은 '시무'로 부른다.
시무나무의 한자 이름은 자유(刺楡)다. 가시가 있는 느릅나무라는 뜻이다. 1870년에 나온 황필수의 한자와 한글 어휘집 『명물기략』에도 刺楡(자유)는 '스믜나무'로 나온다.
시무나무의 이름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옛날 가로수나 이정수(里程樹)로 20리마다 이 나무를 심어 길손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름이 유래됐다는 설(說)과 억센 가시(사실은 가지)에 한번 찔리면 스무 날 가량 고생한다는 속설이 대표적이다.
시무나무는 '20'이라는 수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20리마다 이정목
지역마다 조금 다르지만 전래되는 「나무노래」에 시무나무가 '약방의 감초'처럼 나온다. "가자 가자 감나무/ 오자오자 옻나무/ 허리질춤 배나무/ 십 리 절반 오리나무/ 열아홉에 시무나무/ 아흔아홉 백양나무……" 노랫말로 미루어 볼 때 시무나무를 거리의 표식이나 이정수(里程수)으로 쓰였을 여지가 많다.
그런데 시무나무 어원과 관련 '거리 20리마다 심은 나무'라고 콕 집어서 기록된 사료(史料)는 찾기 어렵다. 나라에서 가로수 정책이나 나무심기를 권장했다면 『조선왕조실록』에 당연히 근거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시무나무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도로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해 길가에 흙을 쌓아 후자(堠子·장승)를 세웠다. 기록을 보면 태종 때 자[尺]로 재서 10리(里)마다 작은 장성[小堠]을, 30리에 큰 장승[大堠]를 설치했다. 세종 때는 각 도 역로(驛路)의 이수(里數)를 다시 측량하고 새로 만든 보수척(步數尺)으로 재서 30리마다 토석(土石)을 모아 설치한 큰 장승 옆에 나무를 심게 했다.
『단종실록』에 주(周)나라 열수(列樹)처럼 경외(京外)의 큰 길 좌우에 소나무·잣나무·배나무·밤나무·느티나무·버드나무 등의 나무를 많이 심게 했다며 이름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여기에도 20리마다 심을 수 있는 시무나무의 이름은 안 보인다. 성종 때 나온 『경국대전』에도 마찬가지다.
다만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민심서』 권12 「공전(工典)육조」의 '도로'편을 보면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말을 빌어 "우리나라 법전에 '10리마다 작은 장승을 세우고, 30리마다 큰 장승을 세운다'라고 나와 있는데, 거기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등을 심는다[每十里立小堠 三十里立大堠 樹之以楡柳]"라고 했다.
시무나무를 느릅나무와 비슷한 나무로 보고 가로수로 심되 간격은 20리마다 식재한다는 의미에서 시무나무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오늘날 시무나무의 이정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마을 어귀의 성황당이나 개울가 비보풍수로 심겨진 노거수들이 남아 있다.

◆유일한 천연기념물 주사골 숲
시무나무는 세계적으로는 1속 1종만 있는 희귀한 나무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귀한 대접을 못 받는다. 역사적으로 대략 2500년 전에 나온 『시경』의 '산에 시무나무 있네'[山有樞]라는 시에 이름이 등장할 만큼 사람들과 친숙한 나무다. 한자로 시무나무 藲(추)로 쓰지만 때로는 樞(추)로도 쓴다.
산엔 시무나무, 진펄엔 느릅나무가 있네
山有樞 隰有楡(산유추 습유유)
그대가 좋은 옷 있지만 멋 부려 입지 않고
子有衣裳 弗曳弗婁(자유의상 불예불루)
그대가 수레와 말이 있지만 달리지 않고 몰지 않으면
子有車馬 弗馳弗驅(자유거마 불치불구)
속절없이 죽고 나면 남이 즐기리라
宛其死矣 他人是愉(완기사의 타인시유)
<「당풍」(唐風)>
시무나무는 습한 토양에서 잘 자라서 하천 주변이나 숲 가장자리에 어린 나무를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지만 우리나라에 노거수는 그리 많지 않다. 시무나무 노거수가 뿌리를 내린 곳은 개울가나 성황당 주변이다. 내습성(耐濕性)이 강해 홍수가 나서 물에 잠겨도 피해가 없기 때문에 하천변 마을 어귀의 비보(裨補)풍수에 이용됐고 성황당의 나무는 마을에서 보호했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유일한 시무나무 천연기념물로는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 주사골의 시무나무숲이 있다. 2007년 비술나무 숲과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주사골의 시무나무숲은 하천을 따라 형성돼 있는데 17세기에 재령 이씨 집안의 주곡공 이도(做谷公 李櫂)와 주계공 이용(做溪公 李榕) 형제가가 수해와 바람을 막고 마을의 경치도 아름답게 하려고 조림했다고 한다.
이밖에 시·군보호수로 지정된 거목이 더러 있다. 문경시 호계면 부곡리와 가도리에도 수령 약 200년 된 시무나무가 있다. 부곡리 가도천 옆에 수령 180년의 당산목을 비롯한 다섯 그루의 시무나무가 작은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상주시 은척면 문암리의 당숲에도 200년을 훌쩍 넘긴 시무나무가 마을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청송군 부남면 대전리 시무나무숲은 개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 양편에 20여 그루가 100여년의 풍상을 이기고 꿋꿋이 서서 있다.
대구에도 시무나무 고목 아홉 그루가 가창댐 상류의 가창면 오1리 옛 어귀에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가창댐이 건설되기 전에 주민들이 오가던 길의 가장자리에 뿌리를 내려 200여 년을 거뜬하게 살고 있다. 한 그루는 최근 바람에 가지가 꺾여 큰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고 느티나무와 혼인목(婚姻木)을 이루는 한 그루는 고사하기 직전이다. 다행히 나머지 노거수들은 생육상태가 괜찮았다.

◆흉년의 훌륭한 구황 식품
시무나무는 느릅나뭇과 시무나무속으로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산지와 하천 주변에 자라는 낙엽 교목으로 높이 20m 정도까지 자란다. 오래된 나무의 껍질은 회갈색을 띠고 세로로 갈라진다. 가지에는 4~8㎝정도 되는 작은 가지가 발달하고 겨울에 잎이 지면 작은 가지가 가시처럼 돋보인다.
잎은 타원형으로 어긋나며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다. 4월 쯤 가지 윗부분 잎겨드랑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 소복이 핀 3㎜정도의 연한 황색 꽃이 존재를 알린다. 꽃은 사람 눈에 잘 띄지 않아서 언제 피었다 졌는지 모른다.
시무나무의 어린잎은 느릅나무 잎과 마찬가지로 흉년에 귀중한 구황 식품이 된다. 봄에 새로 나오는 부드러운 잎에 밀가루나 쌀가루, 콩가루 등 여러 가지 가루를 버무려 떡을 만들어 먹었다. 아주 오래된 전설이 아니라 불과 50여 년 전의 현실이었다.
목재는 재질이 굳고 치밀하며 물속에도 잘 썩지 않아서 배나 농기구를 만드는데 많이 쓰였다. 특히 수레바퀴를 만드는데 박달나무를 으뜸으로 쳤고 시무나무로 만든 바퀴 축을 축유(軸楡)라고 하여 그다음으로 여겼다.

◆가시처럼 보이는 어린가지
가을에 잎이 지고나면 앙상한 가지가 드러나는데 짧은 가지가 굵은 송곳처럼 삐쭉삐쭉 내밀고 있어 가시로 오해받는다. 예전에 마을 인근 하천변의 어린나무는 낫질을 자주 당하게 되면 날카로운 가시(가지)를 촘촘하게 내밀었다. 시무나무의 이런 성질을 이용해 충청남도 당진시 몽산성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인위적으로 이중 방벽 형태의 군락을 조성되었다고 한다.
변방 성에 서리 내려 시무나무 누렇게 시들고
邊城霜落刺楡黃(변성상락저유황)
하늘 끝 높은 바람이 기러기 행렬 보내네
天末高風送雁行(천말고풍송안행)
팔월 관하에 소식 끊어지니
八月關河消息斷(팔월관하소식단)
고향으로 돌아갈 길 가을 들어 멀어졌네
故園歸路入秋長(공원귀로입추장)
<『동주집』 시집 「철성록6」>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민구(李敏求 1589~1670)의 시 「가을 흥취 열 수의 절구」[秋興十絶句] 가운데 여섯 번째 수에 시무나무[刺楡]가 수묵화처럼 소환된다. 이민구는 실학의 선구자인 지봉 이수광의 차남으로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중 달성군 하빈면의 하목정(霞鶩亭) 등을 방문하여 제영시(題詠詩)를 남기고 대구의 학자들과 교유했다. 이 시는 평안도 영변의 철옹성(鐵甕城)에서 귀양살이할 때 쓴 작품으로 수구초심의 간절함이 묻어난다.

『대구의 나무로 읽는 역사와 생태 인문학』 저자·전 언론인chunghama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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