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우리나라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1950년대, 혹시 모를 식량 부족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바로 '양곡관리법'이다. 1950년 제정 당시 안정적인 식량 확보, 양곡의 수급 조절과 적정 가격 유지, 그리고 이를 통한 국민경제 안정이 법의 목적이었다.
이후 세계 경제가 급변하고 국제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쌀 시장에 대한 개방 압력이 거세졌다. 정부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공공비축제와 같은 시장친화적인 정책을 도입했으나 원래 법의 목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최근 때 아니게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쌀 초과 생산량이 3~5% 이상이거나 평년 대비 가격이 5~8% 이상 하락할 경우 정부가 의무적으로 수매하도록 규정하고, 양곡의 시장가격이 평년 가격 미만으로 하락할 경우 정부가 차액을 지급하는 '양곡가격안정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이 이번 개정안의 골자이다.
개정안을 밀어붙이는 입장은 쌀 값이 폭락하게 되면 정부의 의무 매입을 통해 농가 소득을 보장하고, 쌀 생산 기반 유지로 식량 자급률을 높여 식량 안보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농가의 소득 안정을 통해 인력 유출을 방지하고 농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반대 입장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이를 추진하는 데 연간 1조 원 이상의 재정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어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생산과 무역을 왜곡하는 보조금으로 분류되면, WTO 규정을 위반하는 꼴이 되어 무역 보복 조치의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곡관리법은 보다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법 개정을 추진하는 이들이 부의 창출과 재분배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곡관리법은 보조금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정부 보조금은 한 국가가 보유한 재산과 임금을 재분배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양곡관리법으로 안정된 소득을 보장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농가에 유익하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지는 소득 안정과 일자리의 유용함이 보조금을 다른 분야에 사용했을 때 생기는 유용한 것과 비교하여 더 절박하고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농민이 회사원, 공장 근로자, 공무원보다 더 중요하다고 감히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정부 보조금은 정치인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일종의 정부 지출이다. 농민들에게 보조하는 만큼 반드시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 보조금을 받게 되는 농민의 편익 뿐만 아니라 보조금 지출을 위해 납세자들이 부담하는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보조금 성격의 정부 사업은 본질적으로 국가의 부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점 역시 깨달아야 한다.
한 나라의 경제력은 오직 생산성 향상과 기술 혁신을 통해 증대한다. 보조금으로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주장도 난센스다. 보조금으로 만들어진 일자리는 대개 일시적이고 오래가지 못한다. 제대로 된 일자리는 오직 혁신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기업의 생산 활동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또한 정부가 공공지출을 늘리면 민간 지출이 줄어든다는 건 논란의 여지가 없다. 정부가 시장을 무시하고 의무적으로 쌀을 수매하는데 쓰인 돈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에 대한 종잣돈이 될 수도, 젊은 부부의 아이들 교육비가 될 수도 있다. 양곡관리법은 농가에 혜택을 주지만, 다른 누군가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모가 자식을 망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자식이 노력하지 않아도 뭐든 주고 대신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역량을 키우려는 동기를 저하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소득을 보장해 주는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다. 무언가를 '보장'한다는 말은 매우 소중할 때가 있다.
시민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특정 집단의 소득을 보장할 때 그 의미는 '차별'과 다름없다. 보호, 보장이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또 다른 차별을 조장하는 고약한 뜻이 되어 버린다.
댓글 많은 뉴스
"제대로 했으면 출마도 못해" "권력에 무릎"…'李재판 중단'에 국힘 법원 앞 집결
노동계, 내년 최저임금 '1만1500원' 요구…14.7% 인상
대북 확성기 중단했더니…북한도 대남 소음 방송 껐다
박홍근 "정당법 개정안 통과시켜 국민의힘 해산시켜야"
대통령실 "청와대 복귀에 예비비 259억원 책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