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부여 사람들의 얼굴과 살았던 터와 산업

입력 2025-06-03 06:30:00

900여 년 긴 역사에도 영토·언어·사람들까지 잊혀 버린 우리의 역사

흥안령에서 내려와 송화강과 합수하는 눈강.
흥안령에서 내려와 송화강과 합수하는 눈강.
부여왕국 영토.(길림 박물관)
부여왕국 영토.(길림 박물관)
길림시에서 출토된 부여인 얼굴,(길림박물관)
길림시에서 출토된 부여인 얼굴,(길림박물관)
대흥안령 후른베이르 초원 말떼. 고구려 전성기에 때 실위가 거주하던 지역이다.
대흥안령 후른베이르 초원 말떼. 고구려 전성기에 때 실위가 거주하던 지역이다.
남성자성 내부 기와.
남성자성 내부 기와.

아. 부여, 어쩜 9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

영토를 잃어버린 것도 기막힌데, 역사는 물론 사람들까지 잊혀져 버린 우리 역사.

◆부여인들은 어떤 얼굴을 했을까? 또 어떤 말들을 사용했을까? 어디에 살았을까?

이 요소들은 문화적인 특성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특성이므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물론 만주 지역의 여러 종족, 부족들의 성분, 또 우리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도 중요하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추론과 상상, 특성 시대의 사건이나 기록 등을 근거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부여인들의 외모, 특히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동아시아 공간은 지역마다, 종족마다 얼굴에 차이가 있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생태환경이 달라지면 동일한 종족들이라도 오랜 세월이 지나 얼굴 등의 모습이 달라진다. 동만주와 북만주 일대도 타이가 지대는 특히 그런 경향이 있다.

부여는 주로 몽골어계이고, 6세기 중반의 사료들에도 부여어와 선비어, 거란어는 말이 통했다고 기록했다. 퉁구스어 계통도 섞였을 것이다.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그리고 현재 만주족으로 기록된 이들은 주로 동만주 일대의 숲과 강 주변에서 살았다. 따라서 전기 부여인과는 활발한 교류가 없었지만, '읍루' 때는 부여와 충돌하고, 생활권이 겹치므로 피가 섞였을 비율은 높았다. 퉁구스계 얼굴은 크고, 평평하며, 코도 낮고 두텁다. 또 하나가 투르크어계 계통의 얼굴이다. 중만주 일대에서 서북방향으로 대흥안령 산맥이 있고, 그 너머가 몽골 초원이다. 백인종 계통과 황인종 계통이 섞인 투르크어계의 주민들이 오래 살았다. 얼굴이 길고, 얇으며 코가 높고, 눈이 깊을 뿐 아니라 수염이 많다. 흉노, 뒤에 나타난 후조 등의 흉노계 나라들, 이어 돌궐(투르크)족들이 투르크계이다. 초원의 청동기 문화가 처음으로 정착한 지역에서 발원한 전기 부여인들은 투르크어계의 얼굴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부여인의 얼굴을 알려주는 증거들이 있다. 길림시의 송화강가에는 얕으막한 언덕에 동단산성이 있다. 고구려 강변방어성이다. 그 옆의 밭이 부여의 왕성이었다는 '남성자성'이다. 여러 번 답사했는데 15년 전까지는 기와편들이 널려 있었다. 여기서 부여인들이 만들어 사용한 금동제 가면이 발견됐다. 길림시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2~3세기 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머리에 상투가 있는데, 얼굴이 길어 폭이 좁고, 광대뼈가 강하게 묘사됐다. 가면의 특성상 눈은 크게 묘사됐지만 남방계처럼 동그랗거나 쌍꺼풀이 있지는 않다.

◆부여인들은 어떤 말을 사용했을까?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부분은 참 중요하다. 많은 이들이 만주 지역에 살았던 종족들에 대한 오해들을 한다.

고대에는 언어상으로 약간의 차이를 느끼면서도 공통어를 중심으로 초기 국가와 민족의 원형이 생성된 경우도 많다. 고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고구려 등은 일부 지역을 빼놓고는 주민들 간에 언어의 소통에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후한서'의 '고구려전'에서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였다. '동옥저전'에서는 동옥저 언어가 고구려와 대체로 같다고 했으며, '예전'에서는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으로서, 언어와 법속이 대체로 비슷하다고 하여 종족적 계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옥저는 안 통한다는 기록도 있다.

'위서'와 '북사'의 '실위전'에는 '실위어는 고막해·거란·두막루와 같다'(語與 庫莫奚 契丹 豆莫婁國同)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두막루국은 북부여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이므로 결국 실위어는 부여계인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실위어는 거란어와 같으므로, 선비어와는 서로 통한다. '실위는 거란의 별류이다'라는 기록도 있다. 거란어는 몽골어에 속한다. 그런데 두막루국은 부여의 후손이니, 결국 실위어는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교차하면 아래 결론이 나온다. 즉 동호계로 알려진 선비어와 거란어는 서로가 통하고, 선비어나 거란어는 부여와 통한다. 그렇다면 부여·고구려·백제·동예 등은 동호계와 언어가 다 통하는 것이다. 다만 옥저는 때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기록됐다. 중국의 쑨진지는 언어적 측면에서도 "실위어는 기본적으로 몽골어족에 속한다. 고대 몽골어족이 동호, 예맥, 실위의 3대 어족으로 나뉘었을 가능성이 비교적 크다"고 주장했다.

◆부여인들은 어느 지역에 살았을까? 시대에 따라서 거주한 중심 지역, 또 생활권은 어떻게 변했으며, 그 지역들의 생태환경은 어땠을까?

고대 사회에서 생태환경은 집단의 정체성이 생성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특히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활동한 지역의 생태환경은 백제, 신라 가야, 고려, 조선, 대한민국 등과 달랐다. 대문에 우리는 부여나 고구려에 대해 오해들을 많이 한다. 부여가 초기에 활동했던 1차 중심지는 대흥안령 산맥을 훑고 내려온 눈강의 상류 지역인 치치하얼 혹은 눈강 하류와 북류 송화강이 만나는 대안(大安)을 중심으로 한 송눈(松嫩)평원 지역으로 본다. 물론 그 이북인 홀룬베이얼 초원도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이 지역은 고구려 때의 부여성이며, 광개토태왕때 부여계 귀족인 모두루는 북부여의 수사로 파견됐었다. 그러니까 초기의 북부여는 현재의 농안과 대안 일대가 중심이었다. 이 지역은 훗날 발해 시대에는 '부여부'였고, 훗날 요나라를 세운 야율아보기의 첫 번째 공격을 받고 무너진 곳이다. 요나라는 이 지역에 '황룡부'를 두었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인간이 거주했고, 서기 전 13~12세기 경의 예맥계 유물들이 여러 장소에서 발견됐다. 예인들은 송화강과 눈강의 초원지구에 거주하던 어렵부락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문화는 우리와 연관이 깊은 길림시 송화강가의 서단산 문화와도 연관됐다. 그런데 중국 학자들은 동호와 예맥 등이 서기 전 16세기에 흑룡강의 최상류이며, 중국의 최북단인 막하(漠河) 지역, 흑하(黑河)시의 북부 지역, 또 눈강 유역 일대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이 맞다면 부여의 영역과 생활권은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나는 중만주의 부여 지역을 여러차례 답사했고, 1995년에는 대안에서 말을 타고 길림을 거쳐 압록강가의 집안(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까지 내려왔다. 부여인의 남하 루트로 추정되는 지형과 이동 과정 등을 살핀 것이다(윤명철, '말타고 고구려 가다'). 초기 부여가 활동한 중만주의 송화강 일대는 2종류의 생태환경이 교차한다. 북쪽은 눈강의 상류와 소흥안령으로 이어지고, 서북쪽은 대흥안령과 홀룬베이얼 초원이, 서남쪽은 거란계가 거주하는 건조지대, 동쪽은 읍루와 물길계가 거주하는 숲지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남쪽은 북상하는 송화강과 하얼빈쪽으로 동류하는 송화강이 만난다.

'삼국지'의 '부여전'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부여는 산과 구릉, 넓은 연못이 많아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높다랗게 트여있다. 땅은 오곡농사에 알맞고, 오과(다섯 가지의 과일)가 나지 않는다." 농경을 분명히 한 것이다. 지금도 대안, 부여 지역은 송눈 평원이라는 넓은 충적평야이고, 수량이 풍부하다. 오히려 산과 골짜기 많은 압록강 중류인 고구려의 수도권 지역보다도 농사를 짓기에 편했다. 부여는 또한 초기부터 초원이 발달한 지역도 차지했다. 서북 만주와 몽골 초원을 잇는 훌룬베이얼 초원은 소와 양들을 잘 사육하고, 기록처럼 명마를 기르기 좋은 환경이다. 북부여의 후예들이 세운 두막루국을 다룬 '위서'의 '두막루전'에는 동일한 글이 실려있다.

그런데 '삼국지'의 '부여전'에는 이러한 색다른 기록도 있다. '그 나라는 소를 잘 사육하고 명마가 나온다'. 즉 우수한 명마의 산지였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부여마를 신마(神馬)라는 최상의 명칭으로 불렀고, 이 말을 구하기 위해서 부여를 공격하곤 하였다. 그 후로도 이 지역을 장악한 나라들은 한결같이 기마문화가 발달하였고, 기마군단을 활용하여 국력을 급성장시켰으며, 말을 무역의 중요한 물자로 삼았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을 잘 몰랐고, 이론도 부족했으므로 남의 이야기를 학설로 맹종한 경향이 있고, 아직도 반복되는 중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부여와 고구려인들은 '유목민(nomade)'이며, '기마민족국가'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료의 기록들과 거주한 생태환경을 고려하면 부여인들은 농경을 주로 하면서 목축을 적극적으로 하는 '목축인(pastoralist)'이다. 즉 유목과 농경 사이의 중간 지대에서 두 공간의 생태적, 문화적 특성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문화권의 사람들이다.

부여인들이 가축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가를 알려주는 '후한서'의 기록이 있다. 부여인들은 '활과 화살, 칼, 창 같은 것으로 병기를 삼고, 여섯 가축으로 벼슬 이름을 지으니, 마가, 우가, 구가 등이 있으며, 읍락은 모두 여러 가(加)에 소속되어 있다.' 이 가운데 마가는 다양한 종류의 말들을 사육하고, 나라에 공급하였으므로 전투력이 강력했을 것이다. 또 북부여국을 계승한 두막루국의 군장도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는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부여인들은 다양한 종류의 말들을 사육하고, 나라에 공급하였으며, 말 산업을 토대로 경제력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는 부인이 투기를 하면 친정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내어줄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또 하나 부여 영역의 다른 생태환경이 있다. '삼국지' 및 '후한서'의 '부여전'에는 부여의 영토를 설명하면서 북쪽으로는 약수(弱水)가 있는데, 2천리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 때 약수는 자연 지리적인 환경을 고려하고, 농목문화라는 부여의 문화적 특성으로 본다면 흑룡강 중류의 일부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데 사실은 흑룡강(아무르강)이라고 부르는 강은 적어도 현재 러시아 영토인 하바로프스크 일대인 중류까지는 송화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고, 나는 그러한 이론을 발표해왔다(송화권 문명권). 중요한 사실은 '약수'는 기본적으로 부여 생활권의 내륙수로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부여에서는 어렵도 많이 발달했고, 내륙의 수계망을 이용해 교통은 물론 모피, 꿀, 생선 등의 상업도 활발했을 것이다. 실제로 전기 단계에는 말갈 계통인 '읍루'를 지배하였으므로 북옥저의 이북, 즉 연해주 남부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여 영토 또는 생활권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농경문화, 목축문화 외에도 삼림문화, 수렵문화, 강문화와 연관이 깊었을 것이다.

긴 역사를 가진 부여는 처음부터 멸망 이후까지도 이러한 다양한 생태환경 속에서 흥망성쇠했다. 따라서 탄생과 종족의 구성, 성장의 역사적인 배경도 복잡했다. 그럼 농경인이며, 목축인이고, 수렵인과 어부의 성격들을 모두 가졌을 부여인들은 어떤 삶, 즉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문화를 누렸으며, 어떤 가치관을 가졌을까?

역사학자·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