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영감의 공간
김겨울, 미깡 외 18명 지음/ 세미콜론 펴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도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아 초조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잠시 노트북을 덮고,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외곽의 카페로 향한다. 사람도, 작업물도 달라진 건 없지만, 공간이 바뀌면 신기하게도 멈춰 있던 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영감'. 이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창의성과 연결된 무언가를 떠올리지만, 정작 그 영감을 '어디에서, 어떻게 얻는가?'란 질문엔 쉽게 답하기 어렵다. 20명의 작업자가 참여한 에세이 '영감의 공간'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디에 있느냐'에 주목한다.
이 책은 '장소'라는 키워드를 통해 영감, 창의력, 회복, 의지 같은 키워드들을 풀어간다. 어떤 공간에 들어섰을 때 마음이 갑자기 놓이거나, 잊고 있던 새로운 감각이 되살아나는 경험이 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를 멈춰 세우고 다시 걷게 하는 힘은 때로 공간에서 온다.
작가, 번역가, 평론가, 영화감독,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등 창작자들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 각자가 정의하는 '영감의 공간'은 아주 제각각이다. 하지만 쉼과 일의 경계에 있는 일상적인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들이 말하는 '영감의 공간'은 대단히 특별한 곳이 아니다. 뜨개 카페, 코인노래방, 올리브영, 폴대, 덕수궁, KTX 등은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친숙한 공간이다. 필진은 이 익숙한 공간들 속에서 고갈된 에너지를 충전하며, 일과 삶의 균형을 회복한다. 에너지의 소진과 충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양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애니메이션 감독 연상호의 작업실에는 만화책과 소설책, 영화 캐릭터 피규어와, 영화 블루레이 등이 있다.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그 공간에는 머릿속을 비우기 위한 여러가지 장비들이 즐비해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 대해 "나의 내면 그 자체. 순전한 나의 공간이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두서없이 널브러져있는 나의 내면"이라고 말한다.
씨네21 기자이자 작가인 이다혜는 아무리 어질러도 다시 돌아오는 '호텔 방'에서 원고지 10장씩을 해치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른 아침 호텔 근처에서 산책을 하고 오전 중에 호텔 방에서 글을 쓰고 나가서 밥을 먹고 돌아와서 다시 글을 쓰는 루틴이 생겼다고 한다.
책 소개 유튜버이자 작가 김겨울은 8년차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지하철 타듯 자주 탄 KTX에 대해 '무침범의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탑승 후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켠 후 혼자 있을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데이터의 연결로부터 해방된 그 순간을 즐긴다.
각자의 공간은 그 사람의 삶의 방식과도 닮아 있다. 누군가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자신을 되찾고, 누군가는 사람들의 소음과 움직임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중요한 건 그 공간 속에서의 '나'의 상태다. 이 책은 은 단지 장소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 머무는 이들의 감정과 리듬, 그리고 시간을 함께 따라가며 읽게 만든다.
영감의 공간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공간'을 되돌아보게 한다. 어떤 이는 퇴근길 전철 창밖 풍경에서, 어떤 이는 화초로 가득한 거실에서, 또 어떤 이는 떠나간 이와의 기억이 배어 있는 방 안에서 다시 삶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장소들은 평범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은 특별하다.
매일매일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겐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공간'이 필요하다. 익숙해서 무심히 지나쳤던 장소가 어느 순간 특별해질 때가 있다. 이 기사를 읽는 지금 그 공간은 어디인가. 나에게 어떤 에너지를 주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224쪽, 1만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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