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물방울'은 뜻밖의 선면화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이 합죽선에 물방울을 그렸다니? 아마 유일한 작품일 듯. 부채의 선면과 김창열의 물방울이 영롱하게 잘 어울렸다. 김창열은 어떻게 부채에 물방울을 남기게 되었을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그려준 것인지 써놓았다.
이어령(李御寧) 인형(仁兄) 불심(拂心) 일구팔칠년(一九八七年) 파리(巴里) 김창열(金昌烈)
1987년 파리에서 김창열이 이어령(1934~2022)에게 그려준 이 부채는 영인문학관에 소장돼있다. 이어령은 프랑스로 갈 때 합죽선을 미리 준비해 파리에서 활동하던 김창열에게 그림을 받아온 것이다. 합죽선 값은 갓대의 단절 마디 수에 따라 다른데 이 부채는 16마디인 고급 부채다.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가들도 지인을 위해 간혹 선면화를 그렸던 것이다.
이어령은 1960년대부터 문화계에서 활동하며 1990년 문화부가 정부 부처의 하나로 처음 생겼을 때 초대 장관을 지냈다. 이어령과 배우자 강인숙은 한국문학을 전공한 교수 부부로 문학박물관 건립을 꿈꾸며 문학인의 초상화, 육필 원고와 유품, 관련된 그림과 글씨 등을 모으고 있었다. 문학인들, 문학을 사랑하는 미술인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문학을 주제로 다양한 자료와 작품을 수집한 이어령과 강인숙은 둘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영인문학관을 2001년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개관했다.
그림이나 글씨가 있는 부채를 소장의 한 분야로 삼은 것을 강인숙은 1970년대 초 일본 교토의 무선(舞扇) 전시장에서 본 부채그림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에게 있어 접선의 반원형 공간은 무한한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신묘(神妙)한 캔버스"라는 영감을 받은 강인숙은 이후 우리나라 합죽선 고유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된다. 그래서 부부는 인연이 있는 시인이나 소설가 등 문학인을 비롯해 화가, 서예가 등 미술인에게 부채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주기를 부탁해 정성 들여 모았다.
영인문학관의 그림부채, 글씨부채는 250여 점에 달한다.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부채 사랑과 예술인들의 공감과 선의로 탄생한 고귀한 작품이다. 이 부부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김창열의 '물방울'을 비롯해 영인문학관의 부채그림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물방울'은 선면 한가운데에 크고 작은 30여 개의 물방울이 부채꼴을 따라 둥글게 그려져 있다. 그림자는 노란색이다. 흰 선면 위의 투명한 물방울과 밝은 노랑의 그림자가 합죽선의 대나무 색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의 부채 사랑 덕분에 합죽선에서 김창열의 물방울을 볼 수 있게 됐다. 이번 주 토요일이 단오다. 단옷날이면 단오선을 선물하며 무더위를 훨훨 날려 보내 무사히 여름 나기를 기원했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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