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여성들의 전쟁 서사

입력 2025-05-22 10:37:05

[책] 그림자 왕
마자 멩기스테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책] 그림자 왕
[책] 그림자 왕

"죽은 이들의 아우성이 더욱 커진다. 우리의 목소리가 들려야 해. 우리는 기억되어야 해. 우리의 존재가 알려져야 해. 애도를 받기 전에는 영면에 들 수 없어. 그녀는 상자를 연다."

소설은 히루트가 기차역에서 금속 상자를 열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상자는 이탈리아 군인이자 사진사였던 에토레가 히루트에게 맡긴 것으로, 이탈리아군 포로로 잡혀있던 시절 자신인 히루트의 사진도 들어 있다. 히루트는 복잡한 심정으로 상자를 들여다보며 전쟁터를 누비던 자신과 동료들을 떠올린다.

부커상, LA 타임스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살만 루슈디, 말런 제임스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극찬을 받은 소설 '그림자 왕'은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배경으로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조명해 낸 작품이다. '원더우먼'이나, '아마조네스' 등을 떠올리게 하는 '여성 전사'의 삶을 작가의 증조모의 실화에서 착안해 생생하게 소환했다.

1935년 부모를 잃은 히루트는 어머니의 친구이자 군 총사령관인 키다네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게 된다. 키다네에게는 아버지의 유품인 소총을 빼앗기고 그의 아내 아스테르에게는 무시당하기 일쑤지만, 언젠가는 자유를 되찾으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은 소녀다. 그런 어느 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히루트는 아스테르를 비롯한 마을 여자들과 함께 밤낮으로 훈련에 매진하며 전사로 성장한다.

전쟁은 모든 삶을 갉아먹는다. 민초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 황제가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패색이 짙어질 즈음, 히루트는 우연히 황제를 닮은 병사를 발견하고 그를 '그림자 왕'으로 내세우는 영리한 계획을 떠올린다. 군인과 시민들은 그림자 왕을 진짜 황제로 여기며 환호하며 전쟁을 이어간다.

전투 중 적진에 깊숙이 들어간 히루트는 그만 이탈리아 군대에 포로로 붙잡힌다. 그곳에서 사진사인 에토레에게 치욕스러운 사진을 찍히고, 죄 없는 민간인을 벼랑에서 떠미는 이탈리아군의 야만성을 목격하며 치를 떤다. 하지만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슬퍼하는 에토레와 대화를 나누며 기묘한 유대를 쌓은 그녀는 에티오피아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던 날, 에토레를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낸다.

시간이 흘러 다시 1974년으로 돌아온다. 사십여 년 만에 에토레와 재회한 순간, 놀랍게도 그 자리에 우연히 진짜 황제가 나타난다. 히루트는 연민을 떨쳐내고 에토레에게 상자를 건넨 후 당장 이 나라를 떠나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리고 황제에게 자신이 그림자 왕의 용맹한 호위병이었다고, 황궁까지 가는 길을 호위하겠다고 제안한다. 황제와 함께 황궁을 향해 걸으면서 히루트는 함께했던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씩 되뇌며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현실의 개연성과 픽션의 재미를 모두 잡은 '그림자 왕'은 귀족과 천민, 노예 간의 신분 갈등 등 당시 에티오피아의 사회상을 서사에 매끄럽게 녹여냈다.

특히 소설은 다양한 인물의 시점에서 서사를 진행해 캐릭터를 다면적으로 그려낸다. 이탈리아군 사령관 카를로 푸첼리와 사진사 에토레, 황제의 시점에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왕의 고뇌와 한탄을 섬세하게 표현하면서 '그림자 왕'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그 의미를 한층 부각시킨다. 여기에다 고대 그리스 연극을 연상시키는 '합창', '막간'과 같은 장은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는 동시에 서사를 다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사진'은 다큐멘터리 자료화면처럼 생생한 묘사로 생동감을 높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