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을 갓 지난 유월 하순 무렵의 초여름 밤이다. 멀리 낙동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원동산 중턱, 꽃그늘 길게 드리워진 벤치에 무연스레 앉아 있다. 은하가의 잔별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모감주나무 샛노란 꽃송이들이 푸른 달빛에 젖어 한껏 깊고 그윽한 운치를 자아낸다.
물고기의 은빛 비늘같이 쉴 새 없이 반짝거리며 저 아득히 먼 아래쪽으로 가물가물 떠가는 느릿한 강물의 간단없는 유영(遊泳), 그 소리 없는 흐름을 넋 나간 사람마냥 긴 침묵으로 하염없이 바라본다. 불현듯 그새 까맣게 잠재워져 있었던 감성의 물결이 일렁이며 내 고요하던 마음을 무지갯빛으로 채운다. 어째서 세월 저편으로 사라져 간 나날들은 하나같이 그리도 애틋하고 순연한 빛깔로만 채색되는 것일까. 어째서 그 기억들은 죄 그리움의 앙금으로 고이고이 가라앉게 되는 것일까.
흘러간 세월 한 자락이 만화경 속의 풍경이 되어 눈앞에 선해 온다. 거룻배에 몸을 맡기고서 낙동강을 건너다니던 어린 날의 영상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또렷하다. 헤아려보니 벌써 사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때 부모님을 따라 외가 가는 길에 이따금 드나들곤 했었던 사문진(沙門津) 나루터, 유원지가 된 뒤로 사람들의 내왕이 잦아지면서 예전의 해 질 녘처럼 고즈넉하던 정경은 도무지 자취조차 가늠할 길 없게 변해 버렸다.
지금은 그 자리에 강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육중한 콘크리트 다리가 도도한 자태를 뽐내듯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제 더 이상 나루터도, 배도 소용이 닿을 필요가 없어지고 만 것이다. 문명의 거센 물살에 떠밀려 나루터와 함께 사라져 가야만 했던 운명의 조각배가 오늘따라 몹시도 그리워진다. 세상 그 무엇이든 단 한 번 생을 부여받았다 그 시기만 달리할 뿐 언젠가는 반드시 떠나야 하는 것, 조각배인들 이 필연의 섭리 앞에 무에 다를 리가 있으랴.
맑은 정신을 깡그리 도둑맞을 정도로 세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잰걸음으로 달음박질하고, 강물마저도 지난날의 그 유리알 같았던 모습을 잃어버린 지 하마 오래다. 시원스럽게 내리뻗은 고속도로며 이리저리 실타래처럼 얽히어 있는 신작로, 심지어 소달구지가 지나다니던 농삿길에서까지 와글와글 쉴 새 없이 내뱉는 수많은 자동차들의 소음이 귓속을 먹먹하게 만들어 놓는다. 마음의 안온함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시대인 것 같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그리 변하지 않고 지난 시절의 정서를 비교적 근사(近似)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은 달밤에 바라보는 강변의 풍광 정도라고나 할까. 만일 그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면, 나는 두 번 다시 화원 나루터를 찾을 마음마저 잃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그새 스물 몇 해가 흘러갔나 보다. 아내와 약혼식을 치른 구월의 어느 날, 햇살이 유난스레 맑았던 이 화원유원지 나루터를 참 오랜 세월 만에 다시 찾았었다. 그날 연분홍 빛깔의 깨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눈부시게 하얀 코고무신을 신었던 아내의 자태가, 내게는 꼭 한 떨기 꽃송이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서 강 저편으로 건너가, 느릿한 걸음으로 금빛 백사장을 함께 거닐며 몇 장의 사진을 추억 속에다 담았다. 서로가 입은 열지 않았어도 눈빛으로, 가슴으로 먼 훗날에 반추할 굳은 언약들도 주고받았다. 아내의 입 언저리에서 보일락 말락 한 우물웃음이 번져 나왔던 것을 지금도 돋을새김으로 기억한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강바람이 설렁설렁 기분 좋게 불어오고, 또 그렇게 불어갔다. 계절은 벌써 초가을로 접어들고 있었건만, 아직은 따스한 봄날 같은 기운을 머금었던 그 강바람에 아내의 저고리 고름이 가오리연 꼬리처럼 지향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다시는 오지 않을 참 행복한 한때였던 것 같다.
그리고 강산이 두어 번이나 바뀔 만큼의 시간들이 한 줄기 바람 되어 훌홀히 흘러갔다. 어느 누가 세월을 소리 없는 폭군이라고 했던가. 그 짧지 아니한 세월이 사람을 몰라보게 바꾸어 놓았다. 한 포기 가녀린 들풀 같기만 하던 아내는 그새 여간한 비바람에는 끄떡도 않을 만큼 건강한 생활인으로 튼실하게 뿌리를 내렸다.
아내는 신혼 시절 걸핏하면 울기를 잘했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조금만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자위에 이내 이슬이 맺혔고, 한밤중에 아이의 몸이 불덩이가 되어 심하게 보채기라도 하는 날이면 금세 눈물방울이 주르르 볼을 타고 굴러 내리곤 했었다. 심지어 어쩌다 동화 속 정경 같았던 그리운 옛 시절의 사연을 꺼내기만 해도 두 눈 그득 물기가 그렁그렁해져서, 나는 하던 이야기를 서둘러 거두기 일쑤였다. 마치 동공瞳孔 가장자리 어딘가에 큼지막한 눈물주머니라도 따로 마련되어 있기나 한 것처럼, 아내의 눈은 대개 젖어 있을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랬던 그였건만 지금은 좀해선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삶의 고갯마루에 부대끼고 세파에 떠밀리며 허위허위 헤쳐 나온 때문일까, 그 철철 넘치던 눈물샘이 맨바닥을 드러낸 봇도랑처럼 그만 자취도 없이 바싹 말라 버렸는가 싶다.
한두 살씩 더해져 가는 나이 탓이리라, 이렇게 눈물을 잃어버린 아내가 요새 와선 오히려 안쓰럽게 여겨지는 것은. 게다가 마른 풀잎같이 윤기 잃은 얼굴 모습이며 거칠어진 손마디를 볼 때면, 마음 한 자락이 생인손 앓듯 아리어 온다. 아내의 잃어버린 눈물을 다시 찾아줄 수 있을 날은 그 언제쯤일는지….

한 인간 한 인간의 삶의 역정은 바로 그가 써 내려가는 그만의 역사. 일상의 굴레에 갇혀 아등바등하는 아내의 애처로운 모습에서, 애면글면 삶을 꾸려 가시던 어머니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본다. 아니, 굴곡 많았던 당신의 그 역사를 만난다.
세월의 수레에 실려, 지는 꽃이파리처럼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간 무수한 지난 나날들. 한 세대가 저물고 다시 새로운 세대가 오고, 한 세대가 떠난 자리에 또 한 세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며, 그리하여 우리네 인생살이는 한시도 머무름이 없는 저 유유한 강물과도 같이 그렇게, 그렇게 유전(流轉)해 가는 것이리라.
◆약력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 등 13권의 책을 펴냄.
-흑구문학상 외 다수의 문학상 수상.
-201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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