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밟힌 농민운동'의 상징 오원춘 씨 "두봉 주교님은 제 생명의 은인"
두봉 주교와의 인연… "화 한 번 안 내시고, 제 손을 잡아주신 분"

"주교님 앞에서는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화를 낸 적도 없으신데 주교님의 말은 가슴 깊이 박혀 반드시 지켜야만 했습니다."
13일 안동 목성동주교좌성당. 선종한 두봉 레나도(프랑스명 르네 뒤퐁) 주교의 미사에 참석한 오원춘(세례명 알퐁소·76) 씨는 한참 동안 성당 앞에 서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성당 초입에 있던 건물, 1978년 자신이 숨어 지냈던 안동교구 건물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저를 살려주셨다"며 "요원들이 쫓아왔는데 주교님께서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잠그시고 제 손을 꼭 잡아주셨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오 씨는 1970년대 대표적인 농민운동가다. 그는 1978년 '씨감자(오원춘) 사건'으로 고초를 겪으며 두봉 주교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지역농협이 불량 씨감자를 농민들에게 팔았고, 피해를 본 농민들이 분노했다. 오 씨는 가톨릭농민회 임원으로 피해 보상 운동에 나섰지만 곧 정권의 감시 대상이 됐다.
그해 6월 그는 포항과 울릉도로 끌려가 보름 넘게 고문을 당했고, 풀려난 뒤 영양 본당의 신부에게 사건을 털어놓았다. 신부는 이 내용을 안동교구에 보고했고, 이때부터 두봉 주교를 중심으로 한 정의구현사제단이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제목의 성명서가 전국 교구에 전달됐고, 그해 8월 6일 안동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제 120여명과 가톨릭농민회 회원 600여명이 대규모 기도회를 열었다. 명동성당과 원주, 청주, 인천, 마산 등 전국으로 퍼진 연대의 불씨는 이후 농민운동의 뿌리가 됐다.
오 씨는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청각장애를 앓고 있다. 대부분 치아도 빠져 위아래 모두 틀니를 한 상황이고 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힘겹다.

그는 "요즘은 몸도 많이 쑤시고 아프고 그때 생각을 하면 숨이 더 가빠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며 "주교님이 안 계셨으면 저는 그때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오 씨는 두봉 주교를 '살아 있는 성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주교님은 화를 한 번도 안 내셨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격려하고 다독이고 좋은 말씀만 하셔서 그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졌다"며 "이상하게 주교님 앞에선 사람이 반성하게 된다. 주먹을 쥐고 가도 그 앞에 서면 손을 펴게 된다"고 했다.
농사일이 바빠 연락을 못 드릴 때면 두봉 주교가 먼저 오 씨의 집을 찾았다. 그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알퐁소야 건강하거라'하시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제가 찾아뵐 수도 없습니다. 너무 그립습니다."
두봉 주교는 프랑스 출신으로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안동교구장을 지냈다. 이후 의성 봉양면 공소에 머물며 직접 농사를 지었고, 주민들과 함께하며 평생을 선교자로 살아갔다. 2019년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고, 2022년 방송에 출연해 오 씨의 사건을 회고하기도 했다.
오 씨는 두봉 주교의 선종이 단순한 한 성직자의 죽음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1970~1980년대 정권과 맞서 싸운 한국 천주교의 역사, 농민운동의 헌신과 고통,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을 구한 숭고한 사랑이 함께 묻어나는 성인의 일대기라는 것이다.
오원춘 씨는 "이제는 주교님께서 하늘에서 하나님 곁에서 저를 지켜보실 거라 생각한다"며 "살아생전처럼 늘 그렇게 따뜻하게 바라보실 것을 생각하면 하늘을 바라볼 일이 많아질 것 같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힌 채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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