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과 범상치 않은 관계 쑨원, 장제스…중화권선 국부로 추앙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으로 대선 시즌이 전개되자 나라 경영의 큰 뜻을 품은 사람들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이때 등장하는 출사표(出師表)란 원래 신하가 적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황제나 왕에게 올리던 글을 뜻했다.
출사표로 유명세를 탄 사람이 제갈량이다. 그는 북벌을 떠나며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는 뜨거운 애국심,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무르녹아 있는 명문이어서 이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일본에선 메이지유신 직전 존황양이파 승려 겟죠(月性)가 쓴 '장동유제벽'(將東遊題壁, '동쪽으로 떠나며 벽에 쓰다'란 뜻)이란 출사표가 유명하다. 청운의 푸른 꿈을 가슴에 품고 고향 야마구치를 떠나게 된 겟쇼는 '사나이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났으니(男兒立志出鄕關)/ 학문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서도 돌아오지 않으리(志若不成死不還)/ 뼈를 어찌 묘에만 묻어야 하는가(埋骨豈惟墳墓地)/ 인간 도처가 청산인 것을(人間到處有靑山)'이란 출사표를 바위에 새겼다.
이 출사표의 임팩트가 워낙 강했던 탓인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도 이와 거의 유사한 시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 지사들을 동경했던 중국공산당 두목 마오쩌둥(毛澤東),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에서 암살한 안중근 의사도 겟쇼가 쓴 시에서 글자 몇 개를 바꾼 출사표를 남겼다.
질풍노도의 혁명 시대에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것은 마오쩌둥이나 안중근 의사뿐만이 아니었다. 신해혁명의 주인공이자 중화민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쑨원(孫文), 그의 정치적 후계자 장제스(蔣介石)도 일본을 높게 평가했고, 일본을 배우기 위해 수많은 중국의 엘리트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근대 일본을 배워라
쑨원은 광둥성 향산현의 미천한 소작농 출신이었지만, 이후 세계인의 길을 걷는다. 9세 때 큰형 쑨메이(孫眉)를 따라 하와이로 건너간 쑨원은 영국 성공회 미션스쿨인 이올라니 학교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 이후 홍콩으로 돌아와 1892년 서의서원(西醫書院, 현재의 홍콩대학 의학부)을 졸업하고 외과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1895년 쑨원은 호놀룰루에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정치단체인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다. 다음해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으나 준비과정에서 탄로나 일본으로 망명한다. 쑨원은 30여 년의 혁명 활동 기간 중 3분의 1 이상을 일본에서 보냈다. 그에게 있어 아시아권의 나라 중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중국이 나가야 할 미래였다.
일본 체류 기간에 쑨원은 대륙낭인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 현양사 창설자 도야마 미쓰루(頭山満), 재계인사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郎)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과 사귀었다. 이들과의 교류에서 그는 새로운 인식의 개안을 하게 된다. 서양은 무력과 이익을 좇는 패도(覇道)문명이요, 동양은 인의와 도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문명이다. 쑨원은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 위협에 처한 아시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일본 지사들의 대(大)아시아주의에 공감하고 의기투합했다.
쑨원은 도쿄에서 중국 유학생, 화교를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여 청조 타도 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장제스가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도쿄진무(振武)학교에 군사 유학을 위해 입교했다. 1910년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장제스는 니가타현의 육군 13사단 다카다(高田)연대 야전포병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장제스는 도쿄에서 쑨원을 만나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했고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근무 중이던 부대에서 이탈하여 귀국, 혁명에 참여했다.
◆쑨원에게 혁명자금 1조엔 제공한 일본 기업인
무릇 혁명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요구된다. 게다가 혁명을 구상하고, 동지를 포섭한 곳은 중국 땅이 아닌 망명지 일본이었다. 쑨원을 신뢰하고 평생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사람은 나가사키 출신의 일본 사업가 우메야 쇼키치(梅屋壯吉)였다. 영화 사업으로 거부를 이룬 우메야는 27세 때 쑨원과 의형제를 맺었다. 쑨원은 "아시아의 미래를 위해 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쓰러뜨리겠다"라고 포부를 밝히자 우메야는 "형이 거병하면 나는 재산으로 지원하겠다"라고 맹약했다.
이후 우메야는 영화필름 깡통에 돈뭉치를 넣어 쑨원에게 보내는 등 열성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쑨원이 혁명에 실패하고 다시 일본에 망명했을 때는 그를 숨겨주고 '중국의 잔 다르크'로 알려진 30세 연하의 쑹칭링(宋慶齡)을 소개해 결혼시켰다. 우메야가 쑨원의 혁명을 위해 무기와 탄약 구입을 위해 지원한 금액을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1조엔으로 추정된다. 그는 명성이나 지위 같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젊은 날의 서약을 중시해 쑨원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중국 혁명의 연출자로 불리고 있다(엔도 호마레 지음, '모택동 인민의 배신자', 타임라인, 2019, 264~265쪽). 두 사람의 관계는 우메야의 증손 고사카 아야노(小坂文乃)가 '혁명을 프로듀스한 일본인'(革命をプロデュースした日本人)이란 책을 내고 관련 자료를 공개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쑨원의 후계자 장제스도 일본과 질긴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군사학을 공부한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퇴하여 대만으로 쫓겨 간 후 제갈량의 출사표에 등장하는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촉한은 조조의 위나라와 결코 함께 존재할 수 없다)를 외치며 대륙 수복을 꿈꾸었다.
종전 후 장제스는 패전한 일본군과 일본 거류민에 대한 보복을 금지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특히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대장은 귀국하면 전범으로 몰릴 형편이었다. 장제스는 그가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도록 중국에 체류시키면서 재판을 열어 무죄를 선고했다.
1949년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 군대에 패해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쫓겨 갔고, 군대는 궤멸 상태에 빠졌다. 장제스는 오카무라에게 대만 국군 재건을 위한 도움을 요청했다. 오카무라는 구 일본제국 장교를 중심으로 '바이탄(白團)'이란 군사고문단을 결성해 20여 년 중국 국민당 정부에 협력했다. 바이탄의 단장 토미타 나오스케(富田直亮)는 중일전쟁 시절 광둥 지역 공략을 담당했던 일본군 제23군 총사령관 출신이다.
일본에서는 바이탄을 지원하기 위해 도쿄 이다바시에 후지구락부라는 군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사(戰史), 전략, 국제정세 등을 연구 분석한 5천 점 이상의 자료를 바이탄에 제공했다. 바이탄은 원산(圓山)군관훈련단(1950~1952)을 결성하여 대만군 장교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했다.
장제스는 대륙 수복계획인 '국광(國光)계획' 수립 및 훈련에 바이탄을 참여시키는 등 미국 군사고문단보다 이 조직을 크게 신뢰했다. 이유는 서양은 풍부한 물량을 전제로 하며 기술만 중시하고 정신을 경시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끝없이 노력하고 고생을 견디는 정신, 근면 검약 생활을 강조하여 일본 전략이 대만군에 더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장제스 군대 특급비밀 일본에 팔아넘긴 마오쩌둥
1952년 미 군사고문단이 바이탄을 해산하라며 압력을 넣자 장제스는 석패(石牌)실천학사(1952~1965)란 명칭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고급 지휘관을 교육시켰다. 석패실천학사 이후에는 '육군지휘참모대학'(1965~1968)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대만군은 사단장급 이상으로 진급하려면 반드시 석패실천학사, 육군지휘참모대학 교육 받아야 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바이탄이 정식 해산된 시기는 1969년 1월이다.
일본과의 협력이란 시각으로 볼 때 마오쩌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침략자와 싸우기 위해 결성된 제2차 국공합작으로 장제스 정부로부터 활동비와 무기를 제공받았다. 1939년 마오쩌둥은 판한넨(潘漢年)이란 중공 첩자를 통해 상하이의 일본 첩보기관인 이와이(岩井)공관에 국민당군 관련 군사 정보를 제공하고 거액의 정보 제공비를 받아 챙겼다. 또 왕징웨이(汪精衛) 일본 괴뢰정부의 특무기관인 '76호'와도 내통하여 국민당군 특급정보를 팔아넘겼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 마오쩌둥은 장제스 군대가 치열한 항일 전투를 벌이는 동안 공산세력 확대에 주력했다. 그의 본심은 "100분의 70의 힘은 공산당의 발전을 위해 쓰고, 100분의 20은 국민당과 타협을 하는 데 쓰며, 100분의 10은 일본군에 대항하는 데 쓰라"는 것이었다(이건일, '모택동 vs 장개석-중국국공혁명사', 도서출판 삼화, 2014, 288~289쪽).
마오쩌둥 군대는 국민정부군 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힘이 없으므로 놀고(遊),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지역에서는 국민정부군을 공격하며(擊), 국민정부군이 전세를 유리하게 끌고 갈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에는 일본군과 합세하여 국민정부군을 협공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이 중일전쟁 기간 중 중공이 강대하지고,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군대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최고의 비밀이다.
쑨원의 호는 일선(逸仙)인데, 경칭은 중산(中山)이어서 손중산으로 불린다. 그의 별칭인 중산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사용했던 가명인 나카야마(中山)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 중화권에서는 쑨원 기념관이 중국 광저우의 중산기념당, 대만 타이베이의 국부기념관, 싱가포르에 중산기념당이 세워져 있다. 오늘날 중국 광둥성의 중산시, 대만 가오슝에 있는 국립중산대학은 쑨원의 경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본과 범상치 않은 관계를 맺었고, 심지어 혁명 자금까지 일본인들에게 제공받은 사람을 공산중국이나 대만에서는 국부로 추앙하는데 이견이 없다. 중화권 어디에서도 쑨원이나 장제스, 미오쩌둥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중국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일정기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이상의 장교가 된 사람은 친일 행위 여부와 관계없이 전원을 친일파로 낙인찍은 한국과는 크게 비교되는 행태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댓글 많은 뉴스
국민의힘 "주 4.5일 근무 대선 공약 반영하겠다"
이철우, '선거 명소' 서문시장 방문…TK 지지세 결집 행보
이준석 "대구경북서도 호랑이 될 만한 사람 키워야…尹에게 누가 직언했나"
한동훈, '한덕수 추대론'에 견제구…"출마 부추기는 건 해당 행위"
유승민, 국힘 경선 불출마…"이재명 이길 생각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