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비행 마지막은 산불 현장…"고 정궁호 기장, 책임감으로 산 사람"

입력 2025-04-09 17:10:43 수정 2025-04-09 21:53:40

대구 동구·북구 분향소 운영…지역 기관장 및 동료 추모
동구청 "고 정궁호 기장 순직자 신청 예정"

9일 대구 동구청 대회의실에 마련된 산불 진화 헬기 조종사 고 정궁호 기장 추모 분향소를 찾은 동부경찰서 직원들이 묵념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9일 대구 동구청 대회의실에 마련된 산불 진화 헬기 조종사 고 정궁호 기장 추모 분향소를 찾은 동부경찰서 직원들이 묵념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9일 대구 동구청에 마련된 고 정궁호 기장의 분향소를 찾은 정 씨의 직장 선배인 배영식 씨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김유진 기자
9일 대구 동구청에 마련된 고 정궁호 기장의 분향소를 찾은 정 씨의 직장 선배인 배영식 씨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김유진 기자

고(故) 정궁호(74) 기장의 마지막 비행은 산불 진화 현장에서 끝났다. 지난 6일 사고 당일 "다녀오겠다"며 밝게 웃은 지 10분 뒤 헬기는 추락했다.

40년 넘는 비행 경력의 베테랑이자 '바보처럼 성실했던 후배'였다는 그의 영정 앞에 동료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고 며칠 전까지도 안전 운항을 당부했던 선배는 망연자실했고, 매일같이 출동을 함께했던 팀원들은 비보 앞에 말을 잇지 못했다.

대구 북구 서변동 산불 진화 중 목숨을 잃은 정 기장의 분향소는 9일부터 사흘간 동구청 대회의실과 북구 무태조야동 행정복지센터에 각각 마련됐다.

이날 오전 9시 20분 운영을 시작한 동구청 분향소에는 구청 간부 30여 명의 조문을 시작으로 홍준표 대구시장, 지역 기관장, 직장 동료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고인의 40년 지기 선배이자 경찰항공대 출신인 배영찬(75) 씨는 영정 앞을 떠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1981년 경찰청 항공대에서 근무를 시작한 배 씨는 약 4년 뒤 정 씨와 선후배로 인연을 맺었고, 경기·충남 경찰항공대로 옮긴 이후에도 연락을 이어가며 깊은 우정을 쌓았다.

배 씨는 "궁호는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일하는, 바보처럼 성실한 후배였다"며 "1994년 본청에 함께 일할 후배가 필요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그였다"고 회상했다.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1994년부터 경찰청 항공과장(배 씨)과 항공계장(정 씨)으로 다시 함께 근무하게 됐다.

배 씨는 "본청 과장 시절, 어느 날 책상 위에 쌓아둔 산더미 같은 서류를 두고 퇴근했는데, 새벽 3시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가보니 에어컨도 없는 더운 여름에 궁호가 홀로 남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 기장이 동구청 임차 헬기 조종사로 활동한 이후에도 두 사람은 불로봉무동 인근에서 자주 만나며 막역한 사이를 이어왔다.

배 씨는 "사고 3일 전, 비행 중 전선 조심하고 공기 흐름 잘 살피라고 당부했는데, 궁호는 '걱정 마라'며 늘 하던 대로 밝게 웃었다"고 말했다. 그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함께 근무했던 동구청 산림보호팀 동료들의 추모도 이어졌다.

정 기장과 8년간 함께 일한 이정훈 산림보호팀장은 "며칠 전 의성 산불 현장에 다녀왔기에 또 출동을 지시하기 죄송스러웠다. 그런데도 기장님은 단 한 번의 불만도 없이 '잘 다녀오겠다'고 했다"며 "10분 뒤 추락 소식을 들었을 땐 믿기지 않았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울먹였다.

같은 시각, 북구 무태조야동 행정복지센터 분향소에도 추모객들이 발길을 이었다. 이곳에는 배광식 북구청장을 비롯한 북구청 직원들, 주민들이 조용히 조문 행렬에 동참했다.

정 씨와 10년 지기였다는 박춘석(65) 씨는 "같이 테니스를 치던 기억이 선하다"며 "올해까지만 일하고 쉰다던 분이 이렇게 갑자기 떠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날 수행원 없이 조용히 분향소를 찾은 문영근 대구 강북경찰서장은 "고인은 경찰 선배이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직접 보고 싶었다"며 "산불이라는 국가 재난 앞에서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신 점에 숙연해진다"고 고개를 숙였다.

한편 동구청 관계자는 "고 정궁호 기장을 인사혁신처에 순직자로 신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9일 대구 북구 무태조야동 행정복지센터에 설치된 고 정궁호 기장의 분향소. 대구 북구청 간부 직원들이 합동으로 조문을 하고 있다. 남정운 기자
9일 대구 북구 무태조야동 행정복지센터에 설치된 고 정궁호 기장의 분향소. 대구 북구청 간부 직원들이 합동으로 조문을 하고 있다. 남정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