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가장 먼전 맞서 싸웠다

◆ 대한민국 구국운동의 중심지, 대구
대구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의병을 일으키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대한민국 구국운동의 중심지다.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등 위기 때마다 나라를 구하는 구국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국가 유지·발전에 큰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대가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침략한 지 8일 만에 양력 5월 30일에 대구에 도달했다. 대구지역에서는 팔공산 부인사에서 정사철과 서사원, 손처눌 등이 중심이 되어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임란 최초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임진왜란 때 대구 현풍 출신 곽재우는 전국 최초로 거병한 의병장이다. 나라가 없으면 목숨이 무슨 소용이냐며 개인재산을 내놓아 의병을 모았다. 붉은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탄 곽재우는 '홍의장군(紅衣將軍)'이란 수식어로 유명하다. 곽재우의 정암진(鼎巖津) 전투는 의병 50여 명으로 육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조선군이 승리한 최초의 전투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의하면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면서 내륙 보급로를 차단하고 호남의 곡창지대 보전에 크게 공헌한 전투임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조선 군대의 군량미 공급을 지원함으로써 이순신 수군의 안전한 활동 토대를 마련했다. 대구시 동구 효목동에 금호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높은 곳에 곽재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망우당공원이 있다.
망우당(忘憂堂)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호다. 대표적 호국공원인 망우당공원 안에는 말을 타고 지휘하는 모습의 곽재우 동상이 서 있고,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망우당기념관 등이 있다. 국난을 당했을 때 의롭게 일어나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던 영남 의병의 신위를 모셔둔 임란호국영남충의단과 의병 관련 내용이 있는 전시관이 조성되어 있다.

곽재우의 묘소는 대구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있다. 당시의 혼인 풍속에 따라 어머니의 친정인 의령에서 출생했지만, 곽재우의 뿌리는 대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곽재우는 임종에 즈음하여 임진왜란 당시 왕릉이 무너진 후 신하된 자가 묘의 봉분을 쌓을 수 없으니 예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묘소가 아주 평범하게 조성되어 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견위수명의 정신으로 사재를 내놓아 창의한 곽재우 정신은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표상이 된다.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날인 6월 1일은 국가로부터 '의병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 24세 청년 의병장, 우배선
임진왜란 당시 '충의에는 귀천의 차이가 없다'라고 하며 거병한 의병장 월곡 우배선이 있다. 우배선은 24세로 약관의 젊은 나이에 지역 백성들을 규합해 대구 화원과 달성 일대에서 맹활약한 청년 의병장이다.
우배선 후손들이 관련 기록을 모아 엮은 월곡실기(月谷實記)에 의하면 우배선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런 위급한 상황에 어찌 의리를 저버릴 것인가?'라고 하면서 양반과 중인, 양인과 노비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의병을 모은 뒤 대구 화원에서 거병했다. 당시 화원 지역은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전략상 요충지였다.
월곡선생창의기념사업회 자료에 의하면 스물넷의 청년 우배선이 주민들을 의병으로 포섭하려 했을 때 '멀쩡한 사람들을 다 죽게 만든다'라는 불신이 있을 정도로 반신반의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593년에 우배선은 화원에서 홍의장군 곽재우와 전투전략을 논의했다. 당시 곽재우로부터 갑옷인 전포와 투구를 선물로 받았는데 이는 현재 월곡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우배선은 현재의 달서구와 화원, 비슬산과 낙동강 일대에서 곽재우의 의병부대와 전략적으로 협력해서 전투했다. 또 소수 정예 부대를 이끌고 게릴라 전술로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우배선은 또 1593년 음력 4월, 대구향교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몰아내기도 했다.
<월곡실기>와 우배선의 증손자인 우석규가 쓴 <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에 일본군이 대구향교 위에 망루를 짓고 관망하는 것을 본 우배선이 통분하며 일본군을 축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배선의 의병부대 조직과 전투 등 의병활동 자료는 월곡역사박물관에 있는 보물 제1334호인 '화원의병군공책'과 '창의유록'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우배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월곡역사공원 내에 월곡역사박물관과 우배선 동상, 창의유적비, 낙동서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 동화사 승병대장, 사명대사 유정
대구 팔공산 동화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승병 활동의 본거지였다. 사명대사 유정은 팔공산 동화사에 승병 지휘본부를 두고 의병활동을 했다. 동화사 봉서루에 영남지역 승병 지휘 본부의 출입문을 뜻하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 현판이 걸려 있다. 전국에는 약 20여 개의 사명대사 진영(眞影)이 있다. 진영이란 초상화를 의미한다.
그중 가장 오래된 사명대사 진영은 팔공산 동화사에 있는 진영이다. 사명대사의 인장인 '영남도총섭인(嶺南都總攝印)'과 승병을 지휘할 때 사용했던 '소라나팔'도 있다. 또한 4,500명의 밥을 담을 수 있는 나무로 만든 큰 밥통인 비사리 구시 등이 팔공산 동화사에 남아있다. 사명대사를 기리는 석장비가 합천 해인사 홍제암 옆에 세워졌다.
석장비를 자세히 보면 비석 한가운데가 열 십(十)자 모양으로 쪼개진 흔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경찰서장이 비문 내용이 조선의 민족혼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네 조각으로 깨뜨렸기 때문이다. 광복 후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팔공산 동화사 승병대장으로 활동한 사명대사는 임란 직후 일본에 잡혀간 3,000여 명의 조선인 송환을 이끄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을미사변 최초 의병장, 문석봉
일반적으로 항일의병은 조선 말기부터 국권을 뺏긴 1910년의 경술국치까지 일제 침략에 대항하여 자발적으로 발생한 무력 항쟁을 말한다(국가보훈부). 조선말인 1895년 10월 8일, 일본군이 낭인들과 함께 경복궁에 무단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명성황후가 대러시아 관계의 핵심인물이라고 판단하고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활화산같이 끓어올랐다. 이때 대구 달성 출신 문석봉은 전국 최초로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문석봉은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버린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 통분했다.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에 나선 것이 을미의병의 효시가 되었다. 국가보훈부 공훈록에는 문석봉의 거병이 다른 의병봉기를 촉발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도화선이 된 것으로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으로 적시하고 있다.

◆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이끈 우재룡
조선말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이다. 산남의진은 주로 팔공산을 비롯하여 영천, 청송 등 경북 북부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했다. 산남의진에서 선봉장으로 우재룡은 연습장을 맡아 의병들에게 군대 경험을 전수했다. 선봉장으로서 팔공산 일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우재룡은 훗날 광복회의 지휘장으로 활동했다. 광복회는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항일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선도단체다.

임진왜란 때 최초로 거병한 의병장 곽재우도, 조선말 을미사변 때 최초로 거병한 의병장 문석봉도 대구지역 출신의 구국 영웅이다. 풍전등화와 같던 나라가 살아남은 데에는 자발적인 구국의 의지로 견위수명의 정신을 실천한 의병들의 힘은 매우 컸다.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연면히 존재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었다. 이로써 대구는 경상도 전체의 사법, 행정, 군사를 총괄하는 지역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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