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버린 밭 다시 일구고, 닫았던 가게 다시 문 열고
농기계 무상 대여…약 챙기면 건강 돌보기
경북 북동부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주민들이 다시 섰다. 대피소에서 잠을 자고, 밭으로 출근하는 일상이 시작됐다. 비닐하우스를 다시 씌우고, 남은 농기계를 살펴보며 올해 농사를 포기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가게를 열고 약·생필품을 챙기는 등 재난을 딛고 일상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타버린 밭 다시 일구고, 닫았던 가게 다시 문 열고
31일 정오쯤,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의 한 밭. 한 노부부가 장화와 모자를 갖춰 쓰고 검게 탄 비닐을 걷어낸 뒤, 새 비닐을 씌우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사과, 깨, 고추를 재배해온 이들은 농사를 막 시작하려던 시점에 산불을 만났다.
화마가 집을 삼키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물을 받아 밭 주변에 계속 뿌리는 등 농기계를 지켰다. 깨와 고추 모종은 불에 탔지만, 노력 끝에 비닐하우스의 금속 뼈대는 녹지 않았고 냉동창고도 무사했다.
박주탁(67) 씨는 "보상이나 복구보다 더 급한 건 농사"라며 "날씨는 기다려주지 않기에 어제부터 오전 7시쯤 대피소를 나와 밭일을 하고, 해가 질 때쯤 돌아간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농사는 공쳤다는 사람도 많은데 최대한 살려보려고 한다. 사과나무는 불에 익고 약을 칠 시기도 놓쳐 힘들겠지만, 깨와 고추는 늦게라도 심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고 했다.
불에 탄 집을 뒤로한 채 대피소에서 생활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일터로 향하는 이재민들은 점점 늘고 있다.
청송 진보면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64) 씨는 지난 25일 산불 발생 이후 가게 문을 닫았다가, 이날 다시 영업을 재개했다. 김 씨는 여전히 청송국민체육센터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주말에 가게를 들러보니 외벽엔 그을음이 남았지만, 주재료가 있던 냉장고는 무사했다"며 "밖에 뒀던 채소만 물러져 그것만 안동까지 가서 다시 사 왔다. 집은 피해가 심각하지만 가게라도 지켜졌으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송에 밥 먹을 곳이 거의 문을 닫아 나라도 가게를 열어야 할 것 같아 당분간은 대피소에서 출퇴근할 계획"이라고 했다.
◆농기계 무상 대여…약 챙기면 건강 돌보기
지자체도 농민 지원에 나섰다. 이날 오후 1시쯤, 주민 대다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고요한 파천면 병부리에 하얀 1t 화물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화물차엔 관리 상태가 양호한 농기계 두 대가 실려 있었고, 청송군 농업기술센터 직원이 직접 불탄 과수원 앞에 기계를 내려놨다.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마을을 돌며 필요한 농가에 센터 소유 농기계를 무상 임대하고 있다"며 "우선 밭고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는 데 필요한 기계를 갖고 왔다"고 설명했다.
의욕을 잃고 멍하니 있던 주민들도, 하나둘 마음을 다잡고 일상 복귀에 나서고 있다.
이날 청송읍에 있는 청송재래시장. 매달 4·9·14·19·24·29일 장이 서는 이곳은 이날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았지만, 시장 주차장은 차량들로 가득 찼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농약상, 슈퍼마켓, 옷가게 등 주변 상점을 찾는 이재민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송 주민 윤모(86) 씨는 "몸만 빠져나오느라 지난주 초에 처방받은 두 달치 혈압약을 다 두고 나왔다"며 "30년 넘게 하루도 빠뜨린 적이 없던 약을 최근 며칠은 제대로 못 챙겨 먹었고, 오늘 아침에서야 병원에 가서 처방을 다시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TV에서나 보던 재난을 내가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아직도 집이 없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청송재래시장 인근 신세계농약사 관계자는 "산불 이후 오늘 오전부터 손님이 부쩍 늘었다"며 "농기계가 모두 탔는데 약은 어떻게 뿌리냐며 하소연하는 분도 있고, 일부 기계를 간신히 지켜낸 분들은 다시 농사를 짓겠다며 약제를 구입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다시 밭일을 시작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댓글 많은 뉴스
홍준표, '개헌' 시사 "내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제7공화국, 탄핵정국 끝나면 국가 대개조 나서야"
박찬대 "한덕수, 4월 1일까지 마은혁 임명 안 하면 중대 결심"
尹 선고 지연에 다급해진 거야…위헌적 입법으로 헌재 압박
'위헌소지' 헌법재판관 임기연장법 법사위 소위 통과…문형배·이미선 임기 연장되나(종합)
순대 6개에 2만5000원?…제주 벚꽃 축제 '바가지' 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