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인생 날아가는데 1시간도 안 걸려" 초토화 된 영덕, 사망자 최다

입력 2025-03-27 14:40:45 수정 2025-03-27 21:16:29

발보다 빠른 불길에 몸 피하기 쉽지 않아

영덕읍내 주변 공장 건물이 화염에 휩싸였다. 독자제공
영덕읍내 주변 공장 건물이 화염에 휩싸였다. 독자제공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냄새와 산을 뒤덮은 연기, 아직 끝나지 않은 산불과의 전쟁.

지난 25일 경북 의성에서 넘어온 산불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영덕군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산불과의 사투를 벌인지 이틀이 지난 27일 영덕은 화마가 더 커질까 무섭고, 모든걸 녹여버린 흔적이 황망하다.

평생을 일군 집과 공장 등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이라도 위안 삼으며 속울음을 삼키고 있다. 눈 앞에서 지인을 잃은 이들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에 눈물도 말라버렸다.

그나마 산불 피해가 적다고 알려진 영덕읍내.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죽은 이가 있기에 그저 삼키고 있을 뿐, 뱉어내면 아픔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30년 넘게 운영한 대게포장용 스티로폼 박스공장이 불길에 한순간 사라졌다. 박승혁 기자
30년 넘게 운영한 대게포장용 스티로폼 박스공장이 불길에 한순간 사라졌다. 박승혁 기자

영덕읍내에서 대게포장용 스티로폼 박스 공장을 운영한 지 30년 넘은 권태화씨는 지품면에서 불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응할 사이도 없이 1시간 만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눈앞에서 불길에 휩싸인 공장을 보며 발만 동동 굴렸다.

이웃의 정비공장은 폭발음으로 영덕읍내를 흔들었다. 수리중이던 20여대의 차량과 2동의 공장 모두 불길과 함께 사라졌다.

권 사장은 "30년 인생이 날아가는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하다"고 했다.

의성 경계 구역과 가까운 지역으로 발을 옮기자 사정은 더욱 심각했다.

매정리 인근에만 사망자가 6명 나오는 등 경북지역 최다 사망자가 발생했다.

요양원 어르신들이 대피를 위해 당시 탔던 차량이 불길에 탄 채 위태롭게 서있다. 독자제공
요양원 어르신들이 대피를 위해 당시 탔던 차량이 불길에 탄 채 위태롭게 서있다. 독자제공

매정리에 살던 노부부는 대피하다 변을 당했고, 근처 요양원에서 지내던 어르신 3명은 대피 차량에 불이 옮겨 붙으면서 목숨을 잃었다. 보호사가 어르신 1명을 구출하고 차로 다가서려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차량이 화염에 휩싸였다. 군의 대피지시를 받고 20분 만에 어르신들을 모시고 탈출했지만 불길의 속도는 그 보다 훨씬 빨랐다.

실종자 수색에 나선 인력들은 더 이상 사망자가 나오지 않길 기도했지만 그 바람은 얼마 못 가 무너져 내렸다. 이날 오후 실종됐던 산불감시원이 이곳에서 불에 타 숨진채 발견됐다.

한 주민은 "어제만 해도 멀쩡했던 이웃이 불에 타 죽고, 그 이웃을 구하러 간 또 다른 이웃도 죽고 지옥이 따로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품면 신안리 주택이 엿가락 처럼 녹아 내려앉았다. 박승혁 기자
지품면 신안리 주택이 엿가락 처럼 녹아 내려앉았다. 박승혁 기자

영덕군 초입 지점인 지품면은 마을 전체가 폭탄을 맞은 것처럼 풍비박산이 났다. 청송에서 넘어선 불길이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마을을 덮쳤다. 지품면 신안리는 139가구 중 36가구가 불에 탔다.

김광현 신안리 이장은 "불에 탄 주택은 대부분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됐다. 벼농사와 복숭아 재배를 주로 하고 있는 마을은 이번 불길로 모든 걸 잃어버렸다"고 했다.

지품면 수암리 마을은 전체 가구의 절반 가량이 불에타는 피해를 입었다. 독자 제공
지품면 수암리 마을은 전체 가구의 절반 가량이 불에타는 피해를 입었다. 독자 제공

인근 수암리는 48가구 가운데 23가구가 불에 탔다. 간단한 짐만 챙긴 97명의 주민들은 대피소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다. 현장에서 피해를 살피고 있는 권영호 수암리 이장은 통신장애로 주변과 통화를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영덕군은 924가구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이들이 당분간 쉴 수 있는 공간 마련을 위해 군이 보유한 숙소 등을 27일부터 제공하고 있다.

불길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10만 평에 달하는 소나무 군락지를 덮쳐 대를 이어 송이버섯 채취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을 망연자실케 했다.

영덕읍 화개리 서남사가 불에 타 사라졌다. 박승혁 기자
영덕읍 화개리 서남사가 불에 타 사라졌다. 박승혁 기자

세워진 지 65년 된 서남사도 삼켰다. 법당과 건물3채 등이 사라지는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현담 주지 스님은 "사람의 걸음보다 빠른 불길에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했다.

27일은 바람이 잦아들면서 불길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김광열 영덕군수는 "현재 상태라면 오늘 자정 불길이 다소 잡힐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의 불편과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