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천마을에 봄이 드네
긴 겨울이 가고, 지천에 봄이 든다. 가지마다 물이 오르고 이내 매화, 산수유가 터진다. 머지않아 지천에 이름 모를 꽃이 만개할 것이다. 겨우내 집 안에 자신을 가두었던 사람들이 지천으로 나가 꽃을 맞을 것이다. 지천에 사람들의 음성이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봄의 진실이 오로지 개화에만 있는 건 아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인정이 솟아나고, 거리에는 새 생명의 기운이 감도는 진짜 봄을, 나는 고대하고 있다. 이 봄날의 찬란하고 눈부신 풍경 속으로, 나는 깊숙이 들어가고 싶다. 봄이 내린 길 위에서 스스로 봄의 일부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걷고 싶은 마을들이 있다. 청도 유천마을이 그렇다.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해 경남 밀양 상동마을과 맞닿은 마을이다. 청도천과 동창천이 만나 밀양강이 되는 곳에 터를 잡은 유천마을 주변엔 벼농사에 적합한 질 좋은 토지가 펼쳐져 있다.
유천마을은 역사가 깊다. 옛 영남대로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으로, 부산 동래에서 출발한 나그네들이 밀양을 지나 도착하는 마을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쪽 길은 동창천을 따라 굽이쳐 흐르고, 다른 길은 청도천을 따라 유유히 이어진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강을 따라 나루터가 있었을 법한 물길이다. 현재 유천마을은 '유천문화마을'로 불리며, 유호리와 내호리 일대를 포함한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유천역이 문을 열었다. 유천마을은 원래도 영남대로의 중요한 관문이었지만, 철도가 놓이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유천역을 통해 물산과 장꾼, 민초들이 드나들었고, 마을에는 영화 상영관과 다방, 양조장과 방앗간, 우체국과 극장, 교회와 미용실, 정미소가 들어섰다. 이곳은 또한 한국 시조 문학의 대가인 이호우, 이영도 남매의 생가가 자리한 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
길게 뻗은 중앙통을 따라 걷다 보면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건물과 상점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 곳이 있다. 1941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 '영신정미소'다.

◆뽀얀 쌀이 물처럼 쏟아졌어
굶주림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허기가 지면 마음까지 시린 법. 배가 든든해야 하루를 살아낼 힘이 나고, 세상일도 해낼 수 있다. 요즘은 더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먹고사는 게 예전보다야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이들이 있다.
과거에는 더 혹독했다. 오죽하면 '초근목피로 연명하다'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보릿고개는 굶주리는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시간이었다. 봄은 환희로 가득한 반가운 계절이 아니라 배고픔과 시름해야 하는 시기였다. 지난해 가을 거둬들인 곡식이 바닥나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계절, 허기를 채울 것이 막막할 때, 마을 정미소는 환희의 등불이었다.
영신정미소도 그랬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쌀을 찧고, 희망을 포대에 담았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절로 채워지는 듯했다. 정미소의 쌀 찧는 냄새는 배를 고프게도 했지만, 쌀밥을 마음껏 떠먹는 상상을 주기도 했다. 영신정미소는 단순히 쌀을 찧는 방앗간이 아니라 마을의 생명줄 같은 곳이었다. 나락 포대가 풀리고 쉼 없이 기계가 돌고, 뽀얀 쌀이 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영신정미소의 대들보에는 '昭和十六年(소화 16년)'이라는 상량문이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에 정미소가 문을 열었음을 알 수 있다. 80년 넘는 세월 동안 마을과 함께한 정미소는 이제 대구·경북의 근대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곳은 죽은 유산이 아니다. 오늘도 문을 열고 쌀을 찧는 살아있는 유산이다.
건물에도 주름이 있다. 영신정미소의 9칸 정면이 그렇다. 80년의 바람과 햇살이 흙벽에 숨어 담담한 주름을 만들어 냈다. 그 주름이 밉지 않다. 정면 한가운데에 자리한 나무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나락 내음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그 내음이 나그네의 허기진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정미소 복판에는 시간의 흐름을 묵묵히 견뎌 온 기계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정미소의 터줏대감답게 아래와 위, 왼쪽과 오른쪽 끝까지 가득 채운 육중한 크기를 자랑한다. 기름때와 나락 가루가 켜켜이 스며든 기계 벨트는, 마치 한평생 노동에 헌신한 사내의 주름진 손과도 같다.

◆한 톨의 나락, 한 톨의 기쁨
정미소 내부는 마치 한 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닌 생활사 박물관 같다. 오래된 대들보와 서까래는 세월의 무게를 견뎌왔고, 주인의 손길이 밴 정미 기계는 마을을 지키는 노거수처럼 장수하고 있다. 햇빛이 비스듬히 스며드는 틈새마다 까끌거리는 나락 냄새가 퍼지고, 그 속에서 잔잔한 정적을 깨고 어르신들의 담소가 들려오는 듯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처럼, 이곳에는 아직도 참새가 천장 틈새를 오가며 배를 채운다. 신식과 첨단으로 무장한 도시의 공장과는 달리 영신정미소는 세월이 쌓인 낡고 오래된 풍경으로 문을 열고 닫는다. 반질거리는 나무 기둥과 바랜 기계는 구식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마을 사람들과 함께한 동반자처럼 보인다. 쉼 없이 돌아가던 도정 기계는 잠시 멈춰 있지만, 그 자체로 역사를 웅변하는 산증인 같다.
벽 한편에는 '식탁마다 쌀밥으로 내 몸 튼튼 나라 부강'이라는 문구가 적힌 1992년 정부양곡판매가격표가 아직도 걸려 있다. 이 문구마저도 정미소의 정겨운 풍경을 완성하는 한 장면이다. 정미소 한쪽에 차곡차곡 쌓인 쌀가마니는 단순한 곡식 포대가 아니다. 마을의 생계를 책임지고, 누군가의 밥상으로 이어질 한 톨 한 톨의 삶이다.
영신정미소는 단순히 나락을 도정하는 곳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을 이어주고, 희로애락을 함께한 보물 창고다. 신식의 편리함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정취가 이곳에는 남아 있다. 한 톨의 나락이 하얀 쌀로 바뀌고, 그 쌀이 밥상에 오르는 기쁨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영신정미소 지킴이, 김말순
"들어와 좀 앉았다 가이소." 영신정미소 주인 김말순(77세) 어른을 만났다. 낯선 객을 서슴없이 방으로 불러 앉힌다. 그리고 손수 물을 끓여 믹스커피를 태워 대접하신다. "정미소 한지 한 40년 넘었어요. 남편 세상 뜨고, 지금은 시동생 도움으로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어요." 경남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나락 농사가 많던 유천마을로 시집을 왔다.
8남매의 맏이인 남편은 제재소에서 나무를 다루는 일과 인근 정부 도정공장에서 일하며 쌀 찧는 기술을 배웠다. 그 덕에 이 정미소를 인수해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한창때는 나락이 도로까지 쌓이고 사람들이 새벽부터 와 줄을 섰다.
"몸 안 아프면 매일 문을 열어요. 아직 정미소를 놓을 생각은 없어요." 골병들어 몸은 고되지만, 이곳에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80년 시간을 품은 정미소에서 주인 김말순 어른은 오늘도 커피 한 잔을 내어주며 사람들을 반긴다. 커피 한 잔에 주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허기진 마음이 뽀얀 쌀처럼 차오른다.
삶이 깃든 곳이 계속 사라지는 무정한 시대라 해도, 김말순 어른의 삶이 깃든 영신정미소는 늘 활짝 열려 있기를 소망한다.

글·사진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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