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90>겸재 정선의 절묘한 '세검정' 부채그림

입력 2025-03-19 10:37:04

미술사 연구자

정선(1676-1759),
정선(1676-1759), '세검정(洗劍亭)', 종이에 담채, 22.7×61.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채꼴 테두리로부터 푸른색 담채가 화면 안쪽을 향해 점차 짙어진다. 짙고 옅은 담채를 따라 주변의 산세와 구비치는 물줄기, 계곡을 이룬 바윗돌, 붉은 기둥의 정자 등이 혼연일체를 이룬 겸재 정선의 '세검정'이다. 바깥을 흰 여백으로 남겨 시선이 더욱 그림 속으로 집중된다. 부채꼴 화폭과 특이한 생김새의 정자가 절묘하게 어울려 새삼 정선의 뛰어난 화면 장악력을 느끼게 해주는 명작이다. 그릴 대상 전체를 머릿속에 다 넣어둔 후 붓을 대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구도가 나오는 것 같다.

높고 낮은 바위를 따라 청량한 물살이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가운데 독특한 입지와 생김새의 세검정이 눈길을 끈다. 계곡으로 성큼 들어서서 바위 위에 앉혔고, 세 방향으로 누마루를 돌출시킨 흔치 않은 구조다. 화강암 암반 위의 정자를 받치고 있는 사각 돌기둥과 기와지붕, 담장 등에 진한 먹으로 윤곽선을 덧대어 형태를 뚜렷이 하면서 건물에 위엄을 주었다. 평면과 지붕이 정(丁)자 형태인 것, 단청을 올린 것, 담장을 설치한 것 등 보통 정자와 다른 것은 세검정이 군 부대의 정자였기 때문이다. 총융청이 이쪽으로 옮겨온 영조 때 지었다고 한다.

정자 안에는 갓을 쓴 양반님 둘이 멀찍이 마주 앉았고 담장 밖에는 붉은 안장의 나귀 한 마리, 말 한 마리와 말구종 소년이 대기하고 있어 두 분이 이곳까지 온 교통수단을 알려준다. '칼을 씻는다'는 정자 이름은 인조반정의 주동자들이 광해군 폐위를 모의하며 칼을 갈았던 데서 나왔다고 한다.

세검정은 북한산에서 발원한 홍제천 물살과 화강암 바위가 어울린 수석(水石) 경치가 빼어난 데다 한양도성의 사소문(四小門) 중 북소문인 자하문 근처에 있어 성내에서 멀지 않은 명승지로 유명했다. 정자 뒤쪽으로 북한산을 그려 넣었고 산꼭대기에 북한산성 성가퀴도 점점이 표시했다. 멀리 북한산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세검정에서 이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보이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이 총합된 경관이다.

세검정은 정조가 왕세손 때 서울의 팔경을 노래한 '국도팔영(國都八詠)'에 일곱 번째 명소 '세검빙폭(洗劒冰瀑)'으로 나온다. 계곡물이 바위 골짜기에 아이스크림처럼 얼어붙는 겨울철 경관이 더욱 장관이었던가 보다.

세검정은 옥소(玉所) 권섭(1671~1759)의 그림도 전하고 정선 이후 여러 화가들이 그렸다. 전 김홍도, 윤제홍, 유숙, 이도영 등의 그림이 남아있고 일본인 화가 야스다 한포의 1940년 무렵 설경도 전한다. 주변 풍광도 산수화의 소재로 부족함이 없지만 정자 자체도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 같다. 정선은 금강산도 뿐 아니라 서울의 실경에 있어서도 하나의 전형을 남겼다.

얼음에 덮여 굳어있던 계곡이 봄 기운에 녹아 물길이 다시 열리는 계절이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