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대전환] 정치개혁을 위한 '열린 장'을 열어나가자

입력 2025-02-02 14:10:07

1987년 수명 다한 헌법… "국민 목소리 반영한 열린 개헌 필요"
정세균 국회의장실 조사 "국민 대부분 개헌 찬성·기본권 강화 필요 공감"
지방분권·주민자치 강화 필요성도 제기돼

서울시청 앞 이한열 열사의 장의차량과 시민의 애도 물결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시청 앞 이한열 열사의 장의차량과 시민의 애도 물결 [연합뉴스 자료사진]

1987년 6월 9일. 희끄무레한 최루가스가 도로를 가득 메웠다. 흰 옷차림의 한 청년은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빨간 옷을 입은 다른 청년이 그런 그를 부축했다. 이날 연세대 앞 시위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은 고(故) 이한열 열사는 한 달간 사경을 헤매다 결국 눈을 감았다. 향년 스무 살이었다.

그해 12월 개헌안이 통과되기까지 수많은 국민이 일상을 반납하고 투쟁에 나섰다.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제9차 개헌헌법은 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국민은 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민정당과 민주당의 '8인 정치회담'은 비공개로 진행됐고, 속기록 같은 자료도 남지 않았다.

이에 따라 1987년 헌법은 '민주화의 상징'으로 우리 역사의 큰 의미를 지님에도,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탄생했는지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다.

최근 다시금 불고 있는 개헌 바람의 한가운데 서 있다. 1987년 개헌 당시 어떤 점이 부족했고,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할지 논의를 시작할 때다.

◆높아진 개헌의 필요성…공론과 합의를 통해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여야 간 개헌 협상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7월 31일 국회에서 여야 협의 하에 개헌협상전담기구로 구성된 '8인 정치회담'이 열렸다. 여당에선 권익현·윤길중·이한동·최영철 의원이 참여했고, 야당에선 김동영·박용만·이용희·이중재 의원이 나섰다.

출범 한 달 만인 8월 31일 '대통령 5년 단임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 협상안이 마련됐다.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헌법 개정안은 10월 12일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투표에서 찬성 254명, 반대 4명으로 통과됐고, 같은 달 27일 국민투표에서도 93.1%의 지지율로 승인됐다.

국민의 염원이 컸던 만큼 제9차 개헌은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8인 정치회담이 비공개로 진행돼 국민이 개헌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던 '닫힌 개헌'이라는 점에서 아쉬움도 남는다.

1987년 8월 31일 민정·민주 양당 8인정치회담에서 민정당 권익현 대표(왼쪽)와 민주당 이중재 대표(오른쪽)가 개헌협상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국회보 캡처.
1987년 8월 31일 민정·민주 양당 8인정치회담에서 민정당 권익현 대표(왼쪽)와 민주당 이중재 대표(오른쪽)가 개헌협상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국회보 캡처.

이후에도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내각제로의 개헌은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3당 합당을 통해 각서까지 작성되며 본격적으로 이뤄지나 싶었으나 당시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 직선제를 고수해 결국 무산됐다. 1997년 대선을 앞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내각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대통령 당선 이후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 외에도 많은 대통령이 임기 중, 혹은 경선 과정 등에서 개헌을 약속했다. 하지만 야당의 반대에 부딪히거나 국정농단,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 등 정치 이슈 때문에 논의가 뒷전으로 밀리며 실제로 개헌이 이뤄지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지난 과거 개헌 논의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논의 과정에서 어떻게 국민 참여를 확대할 것인지, 나아가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어떻게 지연을 최소화하고 협의를 도출할 수 있을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논의됐던 대통령 임기를 4년 연임제로 바꾸는 '원 포인트 개헌'처럼 실제 개헌을 위해선 쟁점을 최소화하면서도, 국민의 참여 절차를 추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정의당 대표를 지낸 김준우 법무법인 덕구 소속 변호사는 "개헌과 관련해 수없이 다양한 목소리가 있기 때문에 2018년처럼 무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며 "그래서 필요하다면 'All or nothing'(전부 아니면 전무)보다는 우선 합의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쟁점들에 한해서 개헌을 추진하는 방안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 참여 방안에 대해선 "원 포인트 개헌을 할 경우 국민이 직접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하는 '국민발안제' 도입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지난 2023년 국회 차원에서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하여 공론화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국민 참여를 유도하는 방안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태호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장은 "1987년 이후로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이에 따라 국민의 기본권을 보다 확장하는 포괄적인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이 경우 정치권이 개헌을 미루는 명분으로 삼을 수 있어 개헌이 상당히 지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센터장은 "지금은 제왕적 대통령제, 거대 정당 독점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정치개혁 방안에 초점을 맞추되, 국민발안제 등 국민 의견을 개헌 과정에서 반영할 수 있는 절차를 추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세균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자유한국당 김성태, 바른미래당 김동철 원내대표가 26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여야 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 정례회동에서 정부 개헌안을 비롯한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세균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자유한국당 김성태, 바른미래당 김동철 원내대표가 26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여야 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 정례회동에서 정부 개헌안을 비롯한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본권 보장 확대…생명·안전권·차별금지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개헌 방향은 기본권 보장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2017년 국회 개헌특위 활동 당시 정세균 국회의장실이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에서 75.4%가 개헌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안전권·생명권·정보기본권·건강권·성평등권 등 기본권 강화가 필요하다는 데 93.9%가 지지했다.

2018년 국회 개헌 자문위원회 최종보고서와 문재인 정부 개헌안에도 기본권 개선안이 우선됐다. 인간 존엄의 전제인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신설하고 평등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실질적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남녀평등에 관한 국가의 의무조항을 신설하는 안도 포함했다.

이 외에도 정보화 사회에 대응하는 정보기본권(알권리, 소외계층의 정보접근권)을 명문화하는 방안도 담겼다. 아울러 사상과 표현의 자유 명문화, 국민복지 향상을 위한 사회적 기본권을 내세우는 등 기본권 강화가 제시됐다.

제20대 국회 개헌특별위원회 간사로 활동한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권력구조의 변화, 정치 갈등의 해소를 위한 개헌에 앞서 헌법의 기본 원칙인 '국민주권'을 다시금 강조했다.

정 원장은 "1987년 체제에서 우리의 최대 관심은 민주화였다. 국민이 직접 지도자와 대표자를 선출하는 직선제가 핵심이었다면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진영 간의 갈등과 권력을 둘러싼 싸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며 "이를 바꾸기 위해선 이젠 정치권 논리가 아닌 국민을 위한 헌법이 무엇인지, 국민주권을 지키기는 방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대구시의회와 경북도의회 등 대구경북 7개 민관단체들이 지방분권 강화 내용을 국회 개헌안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다. 매일신문DB.
지난 2017년 대구시의회와 경북도의회 등 대구경북 7개 민관단체들이 지방분권 강화 내용을 국회 개헌안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다. 매일신문DB.

◆지방소멸 시대, 지방분권 개헌

다시금 불붙은 개헌 논의에서 지방분권 개헌 역시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민주주의 제도 전반에 대한 논의와 함께 중앙권력 개편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과 상생할 수 있는 개헌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는 "1987년 체제는 탈권위주의 패러다임을 반영한 헌법으로 이미 40년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또 다른 사회 문제들이 야기돼 왔다"며 "이를 해소하고 새로운 시대 환경의 가치들을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자치분권'이 가장 필요하다. 개헌 논의가 권력구조에만 집중돼왔는데, 이제는 자치분권을 두고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앞서 지역에서도 지방분권 개헌과 관련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2017년 대구시의회와 경북도의회 등 대구경북 7개 민관단체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를 통해 ▷헌법 제1조 지방분권국가 명시 ▷지역대표형 상원제 도입 ▷지방의 입법권과 재정권 강화 등의 내용을 국회 개헌안 포함할 것을 촉구했다. 2021년에는 대구시 지방분권협의회가 전국 최초로 각계각층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방분권 헌법개정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방분권 운동도 이번 개헌 논의가 활발해짐에 따라 적극적인 행보를 펼칠 예정이다.

이창용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상임대표는 "1987년 체제는 국민의 대표를 뽑는 민주제도를 갖춘 헌법이지만 이제는 주권자가 각 지역에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게 민주주의에 더 심화 발전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앞으로 개헌의 방향은 지방분권과 주민자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방 정부와 지방의회가 의미 있는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자치 법률 재정권이 주어져야 지역이 당면한 청년 유출과 지역 소멸의 문제를 해소하고, 정치·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했다.

기획탐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