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강은경] 불신의 유예

입력 2025-01-19 16:28:02 수정 2025-01-19 17:31:46

강은경 사회부 기자

강은경 사회부 기자
강은경 사회부 기자

지난 2020년 7월 대구 수성못에서 한 정치인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묻고 답하는 '정치 버스킹'이 열렸다. 마이크를 잡은 정치인은 당시 대구 수성구을 국회의원이던 홍준표 대구시장이었다. 후반부에 접어들 때쯤 홍 시장이 "대구경북(TK) 최대 현안 얘기를 해보겠다"며 화두를 던진 것은 'TK 행정통합'이었다.

"지금 TK 행정통합 하자고 난리인데 통합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비전과 세부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TK 주민들을 위해 뼈를 깎는 개혁을 할 자신이 있으면 통합하자는 겁니다. 그냥 덩치만 커지면 중앙정부가 권한과 예산을 더 준답니까?"

지난해 5월 TK 행정통합 추진을 표명한 이후 그가 왜 지자체 간 '양적 결합'이 아닌 '질적 통합'을 피력해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행정통합의 핵심인 지방정부의 권한 강화와 재정 확대와도 맥이 닿아 있다.

TK 행정통합은 지난해에도 지역의 최대 화두였다. 대구경북이 쏘아 올린 통합 신호탄은 전국적으로도 큰 관심을 받았다. 극단적 진영 대립으로 커지는 정치적 피로감 속에 대구경북이 국가 미래를 위한 논의를 구체화한 것은 신선함을 안겼다. 아직 살아 보지 않은 시간인 서울특별시에 준하는 위상의 '대구경북특별시'는 마치 가상현실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동안 비수도권은 중앙정부의 입만 바라봐야 하는 의존적인 처지가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여러 차례 목격해 왔다. 대표적으로 '2차 공공기관 이전'을 두고 발표와 무산을 반복하며 희망 고문으로 불신을 부추겼다.

현재 공공기관 총 339곳 중 46%에 달하는 157곳이 수도권에 본사를 두고 있는 반면 대구경북은 24곳(7%)에 불과하다. 기업 상황은 더 극단적이다. 100대 기업의 본사 90%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공항도 마찬가지다. 2023년 기준 전체 국제선 항공화물의 96%가 인천공항을 통해 처리됐다. 국제선 여객 수송도 국내 전체의 81.3%가 쏠렸다. 공공기관과 대기업, 인천공항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집중은 '일극 체제'라는 비판을, 비수도권에는 소멸 위기를 불러왔다.

우리나라 수도권 인구 집중도 50%는 일본(34%)과 프랑스(18%), 독일(7.4%) 등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더욱 기형적인 형태를 취한다. 이들 국가는 일찍이 대도시권 육성을 국가경쟁력의 핵심으로 인식,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왔다. 글로벌 대도시권 경쟁 격화로 1950년 2개였던 인구 1천만 명 이상의 도시는 2020년에 30개로 늘어났다.

이에 대구경북은 2026년 7월 '대구경북특별시' 출범이라는 유례없는 로드맵을 세웠지만, 행정통합 동의안이 대구시의회를 통과한 이후 경북도의회 동의를 위한 절차를 밟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12·3 계엄과 탄핵 국면이 변수로 작용해 차질을 빚고 있다.

가상현실 세계에서는 '불신의 유예'라는 개념이 있다. 현실 공간을 넘어 가상현실에 도착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라는 불신을 기꺼이 억제한 상태, 즉 '불신의 유예'가 이뤄진 동안에만 가상현실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행정통합에 동력을 다시 부여할 핵심 열쇠도 대구경북의 상호 신뢰와 의지에 달려 있다. 또다시 손을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지역 경제 지표들에 줄줄이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다. 역사적으로 가장 큰 변화의 문 앞에 선 대구경북이 스스로 발길을 돌려서는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