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론새평-김성준] '오징어 게임'과 과반수 의결의 폭력성

입력 2025-01-15 11:27:02 수정 2025-01-15 17:55:15

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얼마 전 화제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2를 보았다. 워낙 첫 번째 시즌을 재미있게 보았던 사람으로서 혹시나 후속작이 기대에 못 미치지 않겠느냐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이번 시즌도 여전히 잘 만들어진, 볼만한 작품이었다.

오징어 게임이 특별히 흥미로운 이유는 드라마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과 복잡한 심리를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생존에 대한 본능, 이기심, 야망, 속임수, 정의감과 비겁함, 윤리적 고뇌, 위기 극복 등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이 게임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난다.

한 가지 직업에 오래 종사하면서 그 일만의 특수한 조건에 의하여 생기는 현상을 흔히 '직업병'이라고 한다. 그 수준과 정도는 다르겠지만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나름대로 직업병이 있다. 사회과학을 업으로 삼는 필자는 그중 중증(重症)에 속하는 부류로 일상적으로 직업병을 달고 산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직업병이 돋고 말았다. 유난히 필자의 직업병을 자극한 것은 바로 드라마 속 게임 진행의 가부를 결정하는 집단적 의사결정의 문제, 즉 과반수 의결에 대한 것이었다.

드라마 속 게임들은 기본적으로 '과반수 의결의 원리'에 따라 진행된다. 즉, 목숨을 건 게임을 계속할지 말지를 참가자들의 과반(2분의 1 이상) 투표로 결정하고 다음 단계로의 진행 여부가 확정된다. 그리고 게임이 진행될수록 과반수의 결정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그 과정에서 치열한 갈등이 전개된다.

극적인 요소가 두드러져야 하는 드라마 특성상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투표 결과로 내 생명과 인생 역전의 기회를 맞바꾸는 상황이 벌어진다. 설령 자신이 더 이상 목숨을 담보로 게임에 참여하고 싶지 않더라도 과반수가 게임을 진행하고자 하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한다. 다수결 결정 방식은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만장일치부터 더 낮은 의결수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여러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한 과반수 다수결 제도가 마치 민주주의의 대원칙이나 되는 양 의심 없이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태도는 다수결 투표의 결정이 한 인간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런 분위기 탓에 다수결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과 폭력성에 대해서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무모하게까지 느껴진다.

우리는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을 곧잘 한다. 물론 형식은 정통성 내지는 합법성을 세우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집단적 의사결정의 결과가 한 사회나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결과에 무조건적인 정통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다수결로 결정한 것이니 무조건 '옳다'는 식의 해석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수가 어떤 생각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다수의 의견이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수(多數)란 문자 그대로 그저 상대적으로 수가 많다는 것뿐이다.

필자는 여러 곳에서 말과 글을 통해 다수결 제도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해 왔다. 특히 다수결 제도를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민주제의 위험한 함정이라고 경고해 왔다. 다수결은 집단적 의사결정의 가장 훌륭한 방식이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방식은 '만장일치'이다. 다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마지못해 다수결에 따른 투표 제도를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점은 참과 거짓,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이성적 동물'이라는 점이다. 세상의 어떤 제도도 신성시해야 할 가치나 추구해야 할 이념이 될 수 없다. 제도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따라 만들어야 하는 인공물에 불과하다.

오징어 게임은 이성이 아닌 선동과 감정에 의한 집단적 의사결정으로 개인의 선택권이 짓밟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이 드라마가 사람들이 다수결을 무비판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생각을 조금이나마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