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월 12일 대구 동촌유원지 동촌장 여관(현 메르모텔 부근) 앞 금호강. "사그랑~삭" "사그랑~삭…." 얼음장 톱질은 나무를 베는 산판일에 비하면 그저 먹기. 소리마저 상쾌해서 인부들은 추운줄도 몰랐습니다. 두툼한 얼음판을 가로 30cm 세로 40여cm씩 네모꼴로 자르고는 묵직한 얼음 집게로 건져 올려 강가 트럭으로 날랐습니다. 벌써 나흘째. 매일 이렇게 10여 트럭씩 얼음을 떠갔습니다.
이들은 경북잠사회 잠업사업소 인부들. 채취한 얼음은 생활용이 아닌 잠종(누에씨) 저장용. 누에씨(알)는 월동하다 기온이 오른 4월 중순 쯤 깨어나(부화) 애벌레(누에)가 되는데, 유일한 먹이인 뽕잎이 5월은 돼야 피어나서 이때까지는 무조건 재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안된 게 잠종냉장고. 석빙고처럼 땅을 반쯤 파서 만든 빙실에 얼음을 채워 늦은 봄까지 누에씨를 보관했습니다.
얼음을 채취하는 이곳은 매일 1천여 명이 찾아오는 스케이트장. 인부들은 달랑 '위험' 깃발 하나만 세워 놓고 야금야금 '운동장'을 잘라 먹었습니다. " 다른 곳도 많은데 하필 스케이트장에서…." 동촌파출소는 단속할 법이 없다며 구경만, 간이식당 주인들은 손님이 줄까 동동거렸지만 트럭이 강바닥까지 쑥 들어오는 이런 명당이 어딨냐며 인부들은 들은 채도 않았습니다.(매일신문 1971년 1월 14일 자)
일제강점기, 양잠을 산업화하면서 곳곳에 건립했던 잠종냉장고. 지금껏 남아 있는 원형은 1915년에 만든 충남 최초의 공주 잠종냉장고 한 곳 뿐. 경북대 상주캠퍼스(옛 상주공립농잠학교)에는 1986년에 복원한 잠종냉장고가 있습니다. 1921년 상주공립농잠학교 개교 당시 건립돼 1960년대까지 사용하다 학교 이전 등으로 헐리자 이 학교 출신 이병춘(농잠 14회) 씨 성금으로 옛 모습을 되살린 것입니다.
잠종냉장고가 없던 시절엔 서늘한 자연 동굴이 곧 저장소. 기록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는 전북 진안 대두산 기슭 풍혈이, 경북 의성 빙계계곡 빙혈과 풍혈은 아득한 조문국 시절부터 누에씨 보관소로 이용됐습니다. 특히 의성 빙혈과 풍혈은 1908년 발견 당시에도 잠종 저장소로 사용했다니 '빙혈의 재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대구엔 동촌 금호강에 얼음창고가 있었습니다. 위치는 현재 화랑교와 망우당 기념관 사이 언덕배기. 겨울이면 바로 아래 금호강에서 얼음을 떠 달구지로, 등짐으로 져 날랐습니다. 창고에 저장한 얼음은 초여름이면 고관대작 저택으로, 부잣집으로, 생선 가게로 팔려나갔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부터 대구는 명주실(견사)을 생산하는 제사공장이 즐비한 섬유도시. 누에씨(알)에서 부화해 자란 누에가 지은 고치를 풀어 질 좋은 견사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튼실한 누에씨가 필요했습니다. 늦은 봄까지 누에씨를 저장하는 잠종냉장고에도 얼음은 없어선 안될 물건이었습니다.
금호강 얼음창고는 해방 직전까지 사용됐습니다. "1969년 제가 이곳에 처음 와서 본 얼음창고는 폐허로 잡초가 무성했지요." 그때부터 지금껏 동촌에 살고 있는 박석희(81·동남보트 대표) 씨는 1972년 이곳에 망우당공원을 조성하기 전까지 얼음창고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했습니다.
지난날 매일신문에서 찾아 낸 금호강 채빙 기록은 1956년, 1971년 단 2건. 얼음공장이 생기고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누에씨를 저장하려 꽁꽁 언 금호강에서 얼음을 썰어대는 풍경은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 역사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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