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가 아닌 금싸라기, 강바닥까지 긁어담았다
새마을운동·공사에 수요 폭증…토사량 많고 교통 좋은 금호강
"노다지 퍼담자" 연일 야단법석
너무 많이 파내자 바닥난 모래…교각 붕괴 위험에 전면 금지령
채취꾼 금호강 끝까지 밀려나
1972년 11월 늦가을 대구시 북구 팔달교 상류 금호강. 해가 짧아져 강물도 차가운데 물장화에 빵모자, 수건을 두른 마부들은 연신 물속으로 말고삐를 다잡았습니다. 강기슭 모래는 벌써부터 다 파먹고 동이 나 멀리 더 멀리 바퀴가 잠기도록 말을 몰았습니다. 모래를 퍼 나르는 말달구지는 어림잡아 10여 대. 한 바리 할 때마다 품값을 쳐주니 마부들의 등살에 조랑말은 숨 돌릴 새가 없습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천마다 지천으로 널려 아이들이 두꺼비집이나 짓던 모래가 때를 만났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이 무렵, 사리(沙利) 즉 모래와 자갈은 필수 건축재. 다리를 놓고 주택을 개량하고 공장을 짓는데 철근, 시멘트가 아무리 귀하다 해도 모래 없이 되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천마다 이렇게 모래를 긁느라 야단이었습니다.
그 중에도 모래 채취 최적지는 금호강. 비만 오면 헐벗은 산등에서 미끄러진 토사가 샛강을 타고 흘러들었습니다. 자호·고촌·신령천(영천), 청통·오목·남천(경산), 불로·동화·팔거천(대구)을 지나 이곳에서 수북이 백사장을 이뤘습니다. 영천에서부터 경산, 대구 팔달교에 이르는 구간은 실어내는 길도 좋아 그야말로 노다지였습니다.
약삭빠른 업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권리금까지 붙인 채취권을 되팔아 삽 한번 뜨지 않고 큰 돈을 만졌습니다. 바가지를 쓴 영세업자들은 본전을 찾겠다고 애꿎은 인부들의 노임을 후렸습니다. 얼마나 퍼냈는지 표도 잘 안나 허가량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퍼 담으면 모두 돈이어서 갈수기 땐 강바닥까지 트럭을 들이밀고 실어 날랐습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1970년 7월 7일 준공) 공사가 한창이던 무렵엔 없어서 못팔았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공사 시즌에는 '모래'가 아니라 '금싸라기'였습니다. 급기야 당국은 고속도로 공사장 2km 내에서는 고속도로 공사용 외엔 사리 채취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 후에도 사리 채취는 각급 도로 공사가 우선. 단 새마을 가꾸기, 교실 증축용 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새마을 운동에다 각종 공사로 사리 수요가 폭증한 1971년 2월, 경북 도내 대부분의 하천 바닥이 기준 이하로 낮아져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일부 업자들은 홍수에 떠밀려 개인 소유 밭에 쌓인 자갈까지 쓸어갔습니다. 눈을 피해 밤중에 라이트를 끈 채 하천을 드나드는 일도 다반사. 금호대교, 무태 잠수교 주변에선 허가량 보다 무려 다섯 배나 더 파냈습니다.
이 때문에 홍수기엔 제방이 힘을 잃고 잠수교 다리는 맥 없이 주저앉았습니다. 군데 군데 웅덩이가 생겨 멱감던 아이들이 변을 당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1972년 대구 8km 구간 금호강에 설치된 위험 표지판은 33개. 모래 채취로 웅덩이 위치가 수시로 바껴 이 마저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1973년 9월부터는 금호강 팔달교 일대에서 칠곡 지천까지 모래 채취가 전면 금지됐습니다. 강바닥을 너무 긁어 팔달교 교각이 붕괴 위험에 처한 때문이었습니다. 모래 운송이 손쉬워 무태·조야·노곡·팔달교 언저리를 맴돌던 채취꾼들은 점점 더 아래로, 1981년 6월엔 달성군 다사면(읍) 금호강 끝단까지 밀려났습니다.
1980년 12월 영천댐 준공, 1981년 공산댐 완공…. 산림도 우거지고 모래길도 끊긴 지 오래. 금호강 백사장은 점점 자갈밭으로 변해갔습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그 무렵, 논밭을 적셔주고 공업용수, 식수에다 모래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던 금호강. 금호강은 오늘의 대구를, 경북을 키워낸 어머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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