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석 방송통신심의위원
정치외교 해설자들의 사과가 통례가 됐다. 지난주 미국 대선 결과에 대한 뉴스 해설 장면이다. 주류 언론은 '유례없는 초박빙'이라고 보도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해설자 대부분은 카멀라 해리스 신승을 점쳤다. 하지만 결과는 일방적인 도널드 트럼프 승리였다. 미디어 대부분이 국민에게 가짜 뉴스를 제공한 것이다.
개표 직전에 필자가 SNS에 초박빙이라는 기사를 올리자 미국에 거주하는 옛 은사가 댓글을 달았다. "'초박빙'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미국과 한국의 주류 언론(mainstream media)이 편향적으로 포장하고, 가리고, 과장하고, 조작하고 최종적으로 '선동'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하셨다.
한국 언론과 해설자들에게도 핑계는 있을 것이다. 미국 표심에 직접 접근이 안 됐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란 도그마다. 디즈니 영화 쇠락의 주원인으로 거론되지만, 미국 미디어도 같은 함정에 빠져 있고 이를 우리나라 언론들이 여과 없이 수용했다. 현실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불가능하게 하는 품질 나쁜 색안경을 낀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미국 공화당의 압승은 민주당이 원인 제공을 한 측면이 많았다. 우려가 컸던 조 바이든의 노쇠 이슈가 첫 TV 토론에서 처참하게 현실화될 때까지 어떤 대책도 없었다. 바이든의 실기는 전략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해리스의 등장으로 귀결됐다. 해리스는 예상했듯이 충분히 유능하지 못했다. 어떤 이슈에서도 트럼프를 능가하지 못했다.
반면 트럼프는 '사법 리스크'를 요령 있게 피해 가며 영웅 서사를 만들었고, 암살 미수 사건은 그 정점이 되었다. 성조기가 장엄한 배경이 되고 트럼프가 흘린 피로 장식된 한 장의 역사적 사진은 대관식 장면 같았다. 여기에 민주당이 보여 주지 못했던 선명한 정책 메시지는 답답한 미국 국민들에게 돌파구를 보여 줬다. 돌이켜 보면 트럼프가 이미지 홍보에서나 메시지 등에서 시종 캠페인을 리드했으니 패했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미국 대선을 예의 주시하는 것은 '한미 관계의 중요성'도 있지만, 정치적인 기시감을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구도 대놓고 얘기는 하지 않지만 트럼프의 승리를 보고 '이재명 대통령'을 떠올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트럼프가 보수당임에도 한국 민주당이 은근히 트럼프를 응원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보수 진영이 시대 한탄만 한다면 그야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꼰대가 되고 만다.
'여우 같은 여자와는 살아도 곰 같은 여자와 살 수는 없다'는 속담이 있다. 여우는 '요령'을, 곰은 '우직함'을 의미한다. 이는 유가의 '문질 논쟁'(文質論爭)과 맞닿아 있다. 공자님은 논어 옹야(雍也) 편에서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 하시며, 문(文, 꾸밈)과 질(質, 본바탕)의 조화가 군자의 조건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문'과 '질' 중에 정치 현실에서는 무엇이 우선일까? 능력은 측정 가능하지만 인격을 객관적으로 가늠하기는 힘들다. 지난 11월 7일 자 데일리안 기사에 납득하기 힘든 여론조사가 발표됐다. "가장 '인격자'인 대권주자는 누군가"란 설문에 이재명(27.4%), 한동훈(17.7%), 조국(13.5%)이 차례로 1, 2, 3등을 차지했다. 수많은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이재명이 1등이었고, 이미 실형을 선고받은 조국이 3등이었다.
미국 대선 결과를 볼 때, '사법적 판단'이 대통령 선거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기는 힘들다. 더더욱 '정치적 올바름'이 객관적인 민심을 반영할 수 없다. 곧 이재명 대표의 여러 사법 리스크 재판 중 첫 선고가 있다. 보수 진영이 기대하듯이 재판만으로 야당 대표의 정치적 생명줄을 끊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판사들도 인간인 이상 민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 대선에서 보았듯이 차기 대선 전에 최종심까지 모두 끝날 수 있을 것이란 보장도 없는데, 설혹 유죄를 선고한다 해도 웬만한 강심장 판사가 아니면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를 바로 감옥에 보내기는 힘들 것이다.
'재판은 판사에게, 정치는 정치인이'가 정답이다. 정치인이 법적 잣대나 재판에만 목을 매고 있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여권이 정치적 리더십을 다시 세우고 그 성과를 보여 줄 때, 오히려 사법 정의를 구현하고 혼란스러운 나라도 정상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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