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비 흩날린 가을 오면
아침 찬바람에 지우지♩
(이하 생략)
이문세가 부른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의 노랫말처럼 가로수 이파리는 가을 찬비라도 내리면 떠나가는 '그대' 모습처럼 금방 나뒹굴며 잊힐 기세다. 지난주 며칠 새 기온이 갑자기 내려갔다가 다시 평년 기온을 되찾는 환절기 널뛰는 날씨가 가로수 잎사귀를 만추(晩秋)의 색으로 바꿔버렸다.
늦가을 노랗게 물 드는 나무는 은행나무, 박태기나무, 벽오동, 생강나무, 석류나무 등이 있지만 도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나무는 은행나무와 백합나무가 아닐까 싶다. 가로수로 심어진 백합나무는 눈에 자주 띄어도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귀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훤칠한 키와 매끈한 몸피를 자랑하며 유독 노란 잎으로 눈길을 사로잡아 가을에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는 '엘로 포플러(Yellow Poplar)'라고 부른다.
대구에는 중구 매일신문사 앞 서성로, 수성구 명덕로, 수성로 중동네거리에서 남쪽 도로, 동구 공항로 등의 가로수가 백합나무다. 동성로 중간에 '멀대' 같이 서있는 나무도 같은 나무다. 대구남산교회 앞의 이 나무는 네티즌들 사이에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과 유명 포털사이트의 「지식백과」의 표제는 '튤립나무'로 게재돼 있다. 사람들은 왜 튤립나무와 백합나무의 이름을 혼동할까?
◆국가표준식물명 바꿔서 헷갈려
백합나무는 미국 중부 지역이 고향으로 우리나라에는 구한말 '신작로'라는 새 길을 닦으면서 가로수에 적합한 플라타너스(버즘나무), 양버들, 미루나무 등과 같이 들여왔다고 한다. 도입 후에는 튤립 모양의 꽃이 피기 때문에 '튤립나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생물학적으로 튤립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10여 년 전에 '백합나무'로 이름을 바꿨는데 우리가 아는 백합과의 식물과는 사돈의 팔촌도 아니다. 식물분류학으로 보면 목련과 집안이다. 나무 이름이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전에 국가표준식물명(국명)을 변경했으니 이름이 헷갈릴 만하다.
튜울립나무 그늘만 깊어가는 자전거보관소
손발 묶인 시간이 정박해 있다
아득히 지워진 이름표와 녹이 슨 뼈마디
무단폐기물 꼬리표를 달고 푸른 추억을 돌리고 있다
(이하 생략)
임동윤 시인의 「그늘」이라는 시의 일부다. 시의 '튜울립나무'가 바로 백합나무다. 2012년 산림청과 국립수목원에서 펴낸 『한국의 가로수』에도 '튜울립나무(Liriodendron tulipifera L.)'로 수록돼 있다.
그러나 현재 '국가표준식물목록' 사이트에서 확인하면 같은 학명이지만 '백합나무'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에 '튜울립나무'에서 백합나무로 국명을 변경했다. 2019년도에는 속명까지 백합나무로 바꿔서 백합나무속 백합나무종이 되었다. 속명 'Liriodendron'은 백합나무라는 의미이고, 종소명 'tulipifera'은 '튤립이 핀'이라는 뜻이다. 학명을 감안하면 백합나무속 튤립나무종이 적당한데 이상하게 바뀌었다. 꽃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도 백합과 튤립을 구별할 수 있는데, 5~6월 백합나무 꽃을 보여주면 대부분 사람들은 튤립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일본 이름은 유리노끼(ユリノキ)로 백합나무[白合の木]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잎 모양이 거위 발바닥을 닮았다고 '아장추(鵝掌楸)'라고 한다. 이 나무 본고장의 인디언은 통나무배를 만들던 나무라는 의미로 '카누우드'라고 부른다.
◆탄소 흡수량 탁월
다 자라면 10m를 훌쩍 넘는 아주 키 큰 나무로 도심의 가로수뿐만 아니라 대학 캠퍼스 조경수로도 많이 심어져 있다. 공해에 강하고 병충해가 거의 없어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비교적 뿌리를 잘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2050년 탄소 제로를 선언했기 때문에 가로수나 공원의 관상 수종을 선택할 때 탄소 흡수 능력을 중요한 요소로 본다. 백합나무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난 '탄소통조림나무'로 알려져 있다. 성장속도가 무척 빠르고 탄소 흡수량이 우리나라 산에 많은 참나무류보다 2배나 높아서 기후변화시대의 탄소 저장용 나무로 주목받는다. 산림청 산하 기관인 국립산림과학원이 우리나라 주요 조림 수목의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을 측정한 결과 30년생 백합나무 1ha가 1년 동안 흡수하는 탄소량이 6.8t에 달해 소나무 4.2t, 상수리나무 4.1t, 잣나무 3.1t보다 1.6~2.2배나 된다고 한다.
산림 당국에서는 백합나무와 같은 유망 수종의 육성과 보급에 힘쓴다. 실제 구미국유림관리소에서는 칠곡군 왜관읍 금산리 산업단지 옆 야산 7.5ha에 2008년 1만6천500주를 심은 결과 지금은 울창한 숲이 되었다. '미인송'에 버금가는 시원한 몸매와 하늘로 치솟듯이 큰 키를 뽐내는 나무들이 야산에 즐비하다. 최근에 칠곡군이 금산도시숲을 조성해 주민들의 힐링과 산림 휴식처로 떠오르고 있다. 또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 조림지에도 낙엽송을 베어 내고 백합나무로 바꿔 심었다. 생장이 빠르므로 용재로 충당하기 위해 조림이 늘고 있다.
백합나무의 목재는 광택이 있는 연한 노란색을 띤다. 결이 부드럽고 고우며 뜨거운 증기 속에 넣어도 물기를 흡수하지 않아 제도판, 화판, 가구재, 합판, 목공제품 및 나무상자 등을 만드는 데 많이 쓰인다. 자람이 빠른 탓에 강도가 약해 건축재로 사용하지 못하지만 산업용 펄프재로도 가치가 높다.
◆아까시나무꽃 못잖은 밀원식물
백합나무는 아까시나무의 벌꿀 생산이 줄어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됐다. 산림청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꿀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든 아까시나무의 대체 수종으로 백합나무를 추천했다. 꽃 피는 기간이 아까시나무보다 두 배가량 길어 꿀 생산량이 비슷하고 품질도 우수하기 때문이다. 백합나무는 아까시나무보다 다양한 토양에서 생육할 수 있고 수명이 70년인 아까시나무보다 3배 이상 길다. 병충해에 강해 한 번 조성해 놓으면 밀원자원으로 오래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백합나무는 고품질의 목재와 질이 좋은 꿀을 얻을 수 있고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까지 뛰어난 팔방미인인 셈이다.
수형이 아름답고 내한성이 강하고 성장이 빨라 도시 가로수로 많이 심어졌다. 대기오염물질을 정화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여름철 땡볕을 피할 그늘을 만들어 도시 열섬현상을 줄이는 데 한몫하고 있다. 근래 대구 도심에 새로 지은 주상복합 고층 건물에도 백합나무가 조경수로 식재된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백합나무는 심는 곳에 따라 생장 차이가 많이 나는데 습기가 많은 땅이나 하천 근처에서 잘 자라는 편이다.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자람이 좋고 건조한 조건에 버티는 힘이 강하다. 도시 공해물질에 잘 견디지만 염분에는 약한 편이다.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한 다른 나라에서 400여 종이 넘는 외래 수종을 도입하여 시험한 결과, 자생종 이상으로 생장과 적응력이 좋은 나무로 백합나무가 단연 손꼽힌다고 한다.
◆나무에 피는 튤립 모양의 꽃
초여름 백합나무는 무성한 잎 사이에 멋진 꽃을 숨겨 놓는다. 6cm나 되는 튤립 모양의 꽃이 무척 아름답다. 세 장의 꽃받침과 오렌지색 반점이 있는 여섯 장의 긴 타원형 꽃잎이 어우러져 와인 잔처럼 위로 향하여 핀다. 묘목을 심은 지 15년이 돼야 처음 피는 꽃은 높다란 가지에 있기 때문에 고개를 젖히고 눈여겨 찾지 않으면 못 보고 지나치기 쉽다. 다행스럽게도 5월에서 6월에 걸쳐 대구도시철도 3호선을 타고 수성시장역과 수성구민운동장역 구간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백합나무 가로수의 예쁜 꽃을 위에서 감상할 수 있어서 초여름의 색다른 즐거움이다.
잎 모양도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나뭇잎과는 확연히 다르다. 잎을 자세히 보면 잎자루는 포플러처럼 길고 잎 가장자리를 누가 한 입씩 베어 먹은 것 같거나 가위로 뭉툭 잘라놓은 듯하다. 연녹색의 15cm 정도 큼지막한 잎사귀 전체 모양은 단순하며 넓적하고 가장자리에 군더더기 없는 기하학적 형태다.
꽃이 진 자리에는 길이 7cm쯤 되는 열매가 자라는데 그 속에 날개 있는 씨앗이 한두 개씩 들어있으며 씨앗 주머니는 겨울에도 달려 있어 앙상한 가지에 멋을 더한다.
일부에서 백합나무와 플라타너스(버즘나무)가 비슷해서 헷갈린다고 말한다. 자세히 보면 잎의 모양과 나무 겉껍질의 색상이 확연하게 다르다. 백합나무의 잎 가장자리는 깔끔하지만 플라타너스의 잎 가장자리엔 톱니가 있고 잎 끝이 뾰족하다. 또 백합나무의 줄기의 겉껍질은 회색이고 세로로 터실터실 갈라지는데 반해 플라타너스는 굳은 껍질이 벗겨져 커다란 버즘 자국과 같은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이 사랑한 나무
최근 화석 연구결과 백합나무는 약 1억 년 전인 백악기부터 지구상에 터를 잡아 미국과 중국에 정착했다고 알려졌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나무를 사랑해 정원을 가꾸는 데 열정을 쏟았다. 버지니아 마운트버논에 있는 사유지를 수목원으로 조성했을 정도다. 당시에 심었던 백합나무 가운데 4그루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중 둘은 독립 전쟁 후 워싱턴이 집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785년에 심은 나무다. 생존한 나무 중 가장 큰 것은 키가 43m에 이른다. 백합나무의 보통 수명은 300년 정도다.
백합나무의 큰 키와 빠른 성장이 되레 화근이 될 수 있기에 가로수로 심을 땐 장소와 환경을 잘 고려해야 한다. 좁은 인도를 훼손할 가능성과 자라면서 전선에 닿을 수도 있으며 상가 입간판을 가려 민원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나무칼럼스트 chunghama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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