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5일까지 대구보건대 인당뮤지엄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총망라…1980년대 페인팅 최초 공개
대구보건대 인당뮤지엄 로비에 높이 7m 가량의 폭포수 같은 작품이 걸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숲의 움직임이, 깊은 비밀을 간직한 듯한 바다의 흔들림이 담겼다.
가까이 다가가니 새까맣게 연필 칠한 종이다. 얼마나 그어댔는지 곳곳이 찢어지고 해어졌다. 작가는 왜 이 같은 작업에 천착하게 됐을까. 전시 초반부터 관람객들은 그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안고 그의 작품에 몰두하게 된다.
최병소(81) 작가는 독창적인 작업 스타일과 철학으로 잘 알려진 한국의 현대미술가다. 신문지, 종이에 볼펜과 연필로 수천번을 그어 한 치의 빈 틈 없이 채우는 독특한 기법과 그로 인한 긴 시간의 반복적인 수행이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다.
인당뮤지엄에서 펼쳐지고 있는 기획전 '나우 히어(now here)'는 1970년대 초기 신문작품부터 최초로 공개되는 1980년대 페인팅과 꼴라주, 1970년대 시도했던 자신의 개념미술을 오마주한 최신 작품까지 그의 일생을 총망라한 전시다. 실크스크린, 비디오 영상, 15m 크기의 대형 설치 작품 등 총 6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1전시실은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이어 온 '무제' 작품들이 전시됐다. 앞, 뒷면을 전부 칠하거나 목탄칠을 더하거나, 접어서 칠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준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그러한 변화는 그의 작업이 무작위로 긋는 게 아닌 치열한 질서감과 입체감을 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순히 노동집약적 작품이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다.
특히 새까만 작품과 대비되는, 빈 볼펜으로 그어낸 새하얀 작품은 색다른 느낌을 준다. 아무런 칠이 없음에도 종이가 꽉 채워져 있는 듯하다.
2전시실에서는 습작과 같은 1980년대 페인팅, 꼴라주 작품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신문지를 접어 구역을 나누고 선으로 면을 채우며, 칼로 그어 표현하는 등 볼펜과 연필로 칠한 작품들의 바탕이 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3전시실로 이어지는 복도에서는 2019년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사르트르의 저서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의 낱장을 일일이 볼펜으로 뜯어 재조합한 작품이다. 책이라는 의미는 해체되고, 종이에 찍힌 낱말만 남아 그 본질적인 물성을 들여다보게 한다.
3전시실에는 작가의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며, 4전시실은 작가가 자신의 1970년대 작품을 오마주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5전시실은 15m 길이의 대형 설치 작품이 바닥에 길다랗게 놓였고, 볼펜과 연필 긋기 작업을 하며 떨어져 나온 종잇조각들이 벽면을 채웠다. 작은 종잇조각이지만, 수행과 같은 작업을 해온 그의 오랜 시간들의 흔적이 느껴져 괜스레 숭고해진다.
결국 그의 작품은 '채움이 곧 비움'이라는 역설적인 의미로 귀결된다. 1970년대 작업 초반 신문을 지우는 그에게 누군가는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붙이기도 했으나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작가에게는 시간을 지우고, 자신을 비워가는 과정이 됐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작가의 의도를 좀 더 가까이에서 광범위하게 느껴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시를 기획한 김정 인당뮤지엄 관장은 "많은 사람들은 최병소 작가의 작품하면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이야기를 까만 볼펜과 연필로 지운 작업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까만 볼펜 칠로 연상되는 최병소 작가의 작품 이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작가는 왜 화면을 다 지워버리고 덮어버려야 했는지에 대한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작가는 중앙대 서양화과와 계명대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프랑스 생테티엔 현대미술관,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 대구미술관 등 국내외 유명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 부산, 대전, 수원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돼있다.
전시는 2025년 1월 15일까지 이어지며, 매주 일요일은 휴관이다. 관람료는 무료. 053-320-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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