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백강의 한국 고대사] 중국 대륙 속에 살아 있는 신라의 역사영토

입력 2024-10-28 11:15:56

당현종 개원(開元) 시기에 재상을 역임했던 장구령.
당현종 개원(開元) 시기에 재상을 역임했던 장구령.
북경 패수 이남의 고조선 고토를 신라 성덕왕에게 되돌려주었던 당현종 이융기.
북경 패수 이남의 고조선 고토를 신라 성덕왕에게 되돌려주었던 당현종 이융기.
안록산,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지란 형세도.
안록산,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지란 형세도.
신라군의 북경 범양군 주둔 사실을 기록한 신당서.
신라군의 북경 범양군 주둔 사실을 기록한 신당서.

◆'신당서(新唐書)'에 나타난 대륙 신라

'당서'란 당나라시대 290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정사를 말한다. 그런데 '당서'는 '신당서'와 '구당서'로 나뉜다. 후진(後晉) 시기에 유후(劉昫), 장소(張昭) 등이 편찬한 것을 '구당서'라 하고 북송시대에 구양수(歐陽修), 송기(宋祈) 등이 편찬한 것을 '신당서'라 한다.

북송 때 인종(仁宗)이 '구당서'가 결함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당서'를 새로 편찬하도록 지시했는데, '신당서' 225권이 편찬된 뒤로는 사람들이 주로 '신당서'를 활용하고, '구당서'는 읽는 이가 많지 않아 '신당서'가 당나라 역사서로서 정통의 지위를 점해왔다.

그런데 '신당서' 136권, 열전 제61, 오승차전(吳承玼傳)에는 신라사와 관련하여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발해국 왕 대무예가 아우 대문예와 나라 안에서 전쟁을 벌였다. 대문예가 당나라로 오자 태복경 김사란과 함께 범양군의 신라 병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대무예를 토벌하도록 조서를 내렸는데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渤海大武藝 與弟文藝 戰國中 文藝來 詔與太僕卿金思蘭 發范陽新羅兵十萬討之 無功)."

우리는 그동안 당나라와 신라의 국경선은 압록강인 것으로 인식해왔다. 그런데 이 기록은 당나라 황제가 "범양군에 있는 신라 병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발해국의 군대와 싸우도록 명령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범양군은 어디인가. 역사상에서 한반도에 범양군이 설치된 적은 없다. 범양군은 삼국시대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 대륙에 설치했던 군으로서 오늘날의 북경시, 천진시, 탁주시 일대에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범양군의 군청소재지는 지금의 북경시 서남쪽에 있었고 북경시 대부분과 천지시의 해하(海河) 이북, 하북성 보정시 일부를 관할하였다.

범양군의 관할구역은 누차 변동이 있었지만 오늘날 북경시 일대 즉 옛 유주(幽州) 땅을 벗어난 적은 없다. 그러면 범양군에 있는 신라 병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발해국의 대무예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린 중국의 황제는 누구인가.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685~762)이다.

당 현종은 당 명황으로도 불리는데 712년~756년까지 44년 동안 재위했다. '신당서' 오승차열전은 위에 인용한 내용이 개원(開元) 22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개원은 당 현종의 연호로서 713년 12월~741년 12월까지 모두 28년 동안 이 연호를 사용했다.

개원 22년은 서기로 734년인데 발해왕 대무예는 발해국 제2대 군주로서 718년~737년까지 재위했으므로 이는 당나라 현종시대에 발해의 대무예왕을 정벌하기 위해 지금의 북경지역인 범양군에 있던 신라 병사 10만 명을 동원한 사건의 기록이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당회요', '구당서', '자치통감' 등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당나라가 신라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를 공격한 것은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이 분명하다.

다만 다른 자료에서는 범양군의 신라 병사 10만 명을 동원했다는 기록은 삭제하고 내용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신라 군사의 동원 사실만을 기재했는데 이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으로 보인다.

뒤에 중국학자들은 당현종이 "범양군의 신라 병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발해국을 토벌했다(發范陽新羅兵十萬討之)."라는 '신당서'의 이 기록을 지워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인정하기도 곤란하자 저들이 낸 잔꾀가 바로 현토를 달리하여 해석을 엉뚱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신당서'의 고판본을 제외한 현대중국의 모든 활자본 인쇄자료나 또는 이 부분을 인용한 문장에는 다음과 같이 현토되어 있다.

"發范陽 新羅兵十萬討之"

범양군을 신라에서 떼어 내 위에 연결시켜 "범양군을 동원하여 신라 병사 10만 명을 토벌했다"라고 해석하는데 이렇게 되면 주어가 사라져서 의미가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공격대상이 발해가 아니라 신라가 되는 웃지 못할 결과를 초래한다.

'신당서'의 "범양군에 있는 신라 병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발해를 토벌했다"라는 기록은 당 현종시대에 신라의 서쪽 강역이 압록강 유역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지역까지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대륙 신라

당나라에서 현종 이융기(李隆基·685~762)가 집권하고 있을 때 발해국에서는 발해왕 대무예가 제2대 군주로서 718년~737년까지 재위했는데 이 시기에 신라에서는 어떤 왕이 다스렸는가. 성덕왕 김흥광(金興光·702~737)의 재위 기간이다.

특히 "범양군에 있는 신라 병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발해를 토벌했다"는 당현종 개원 22년 즉 서기 734년은, 신라 성덕왕이 서거하기 3년 전이다.

그러면 신라 성덕왕 시대에 과연 신라의 강역이 서쪽으로 북경지역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있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4년 조항에 "의충이 돌아올 때에 황제가 칙서로 패강 이남의 땅을 하사했다(義忠廻 勅賜浿江以南地)"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735년 신라의 김의충이 당나라에 신년을 축하하는 사절로 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당 현종이 패강 이남의 영토를 조칙으로 신라국에 하사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736년 신라의 성덕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영토를 하사하여 신라의 강역을 넓혀준 것(錫臣土境 廣臣邑居)"에 대해 감사하는 표문(表文)을 올려서 그 내용이 '삼국사기' 성덕왕 35년 조항에 실려 있다. 이는 성덕왕 시대에 패강 이남의 땅이 모두 신라의 영토였음을 '삼국사기'가 기록으로서 입증하는 것이다.

패강이란 어떤 강인가. 곧 패수를 가리키는데 그동안 사대,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패수를 청천강으로 보아온 것이 반도사학의 입장이다.

그러나 최근 '사고전서'의 새로운 자료 발굴을 통해서 지금 북경 북쪽의 조백하(潮白河)가 송나라 때까지 조선하로 불렸고 조백하가 한, 당시대의 패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성덕왕은 통일신라의 제5대 왕으로서 김춘추로부터 불과 48년 뒤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 패수가 만일 청천강이나 압록강이라면 신라가 이미 압록강 이남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데 당 현종이 패수 이남의 땅을 신라에 하사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된다.

당 현종은 왜 패수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하사한 것일까. 북경의 조백하 유역은 고조선의 중심지였고 부여, 고구려, 백제 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우리민족의 영토였다. 패수 이남의 땅은 본래 중국 영토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고유한 터전이었으므로 그래서 신라에게 조상의 고토를 되돌려 준 것이다.

즉 중국의 당 현종은 북경의 고조선, 고구려 고토를 신라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신라 성덕왕 때 서쪽 강역은 북경의 조백하에 이르렀고 그래서 북경 범양군에 주둔해 있던 신라 군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발해를 정벌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통일신라 초기의 서쪽 강역은 청천강이나 압록강이 아니라 대륙의 북경 북쪽 조백하였다는 것은 "황제가 칙서로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하사했다(勅賜浿江以南地)"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범양군에 있는 신라 병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발해를 토벌했다"는 '신당서'의 기록을 통해서 입증이 된다고 하겠다.

◆대륙 신라를 증명하는 당현종 시대의 명재상 '장구령문집'(張九齡文集)

당 현종이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책부원귀'(冊府元龜)에도 "패강 이남을 신라로 하여금 안치하도록 하였다(浿江以南 令新羅安置)"라고 말하여 그것을 인정한 내용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패강이 한반도의 청천강이 아니라 북경에 있는 강이라는 것은 당 현종때 재상을 역임했던 '장구령문집'의 다음 문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신라왕 김흥광에게 내리는 칙서: 경(성덕왕)이 패강에 군대를 주둔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패강은 발해와의 요충지인 데다가 안록산과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입니다. 이는 원대한 계략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훌륭한 계책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與新羅王金興光勅 知卿欲于浿江置戌 旣與渤海衝要 又與祿山相望 仍有遠圖 宜遵長策)"

안록산(703~757)은 요녕성 조양시 출신으로 당 현종 이융기와 양귀비의 신임을 얻어 평노, 범양, 하동 3절도사를 겸임했고 755년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남하해 낙양을 함락시킴으로써 안사지란(安史之亂)이 폭발했다.

당 현종이 성덕왕에게 내린 칙서에서 "패강이 안록산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고 말한 것을 본다면 이는 북경 지역에 위치한 강이 분명하고 또한 이런 기록이 당 현종시대의 재상 '장구령문집'에 실려 있다는 것은 신라의 서쪽 강역이 당나라 시대에 북경 일대였다는 확실한 반증이 된다고 하겠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추기:이번 호부터는 그동안 연재해왔던 '발해조선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한국 고대사 전반에서 오류가 있는 부분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표제에서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는 삭제하고 '심백강의 한국 고대사'라고만 기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