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복숭아꽃·오얏꽃 활짝…신라 최초의 절터 잡다
도 탐구 위해 남쪽으로 온 아도화상…418년 눌지왕 때 신라 첫 사찰 창건
호국 불교로 삼국통일 완성 원동력…매년 '향문화대제전' 열어 기리기도
"복숭아와 오얏은 꽃이 곱고 맛이 좋아, 오라고 말은 안해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그 나무 밑에는 저절로 길이 생긴다지요..".'아도(阿道)화상'이 남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달마(達磨)가 동쪽으로 간 까닭'과 같을까?
◆신라에 불법을 전하러 온 구도승
아도는 포교(布敎)가 목적이 아니라 '구도'(求道)를 위해 남쪽으로 간 것이리라. 끝없는 구도의 길, 그것이 그가 찾아 나선 불법(佛法)을 찾는 불도(佛道)였을 것이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대사가 토굴이라 여기며 잔 무덤에서 해골바가지에 든 물을 마시고 난후 '만물유심조'(萬物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를 깨달은 뒤 유학을 포기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거무스름한 피부색깔을 가진 아도화상은 고구려를 거쳐 온 서역인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후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를 비롯한 수많은 신라의 구법승(求法僧)들은 당나라를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 구도여행을 떠났다. 타클라마칸 사막과 히말라야를 넘었고 때로는 국경을 넘다가 스파이로 몰려 목숨을 잃기도 한 위험천만한 구도여행이었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구법승 61명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신라와 고구려 구법승 각각 7명과 1명이 포함돼 있다. 서역, 즉 천축(天竺)은 부처의 나라 인도였다.
아도화상은 신라스님들과 달리 서역에서 신라에 불법을 전하러 온 구도승이었다. 아도화상의 궤적을 따라나서는 길은 신라 호국불교의 전래를 찾아나서는 길이었다. 아도화상이 머물던 불교초전지 도개(道開) '모례가정'(毛禮家井)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평에서 도리사(桃李寺)를 만났다.
◆향(香)문화대제전 열려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세운 신라 최초의 절이다. 절 경내로 들어서기 전 처음 만나는 일주문에는 '東國最初伽藍'(신라 최초의 절) 이라는 자랑스러운 명칭이 붙어있다. 도리사는 눌지왕 때인 418년 창건된 신라고찰이다.
설화는 "모례(毛禮)의 집에서 생활한 지 3년이 된 아도는 홀연히 집을 떠나 부근의 냉산으로 들어갔다. 산속을 걷다가 눈 속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곳을 발견하고는 그곳이 길지임을 깨닫고 절을 세웠는데 그 절이 도리사이다."라고 전한다. 냉산은 도리사가 자리한 태조산(太祖山)의 옛 이름이다.
일주문에서 도리사로 향하는 2km가 넘는 느티나무 숲길이 장관이다. 특이하게도 일주문에서 경내까지는 4km가 넘게 떨어져있다. 이 길은 2013년 산림청이 발표한 한국의 가로수길 62선에 들어갈 정도로 청량해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잠시라도 걸으면서 아도화상이 권하는 명상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때맞춰 3일 오후 도리사일대에선 '향(香)문화대제전'이 열렸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처음으로 불법(佛法)과 향 문화를 전래, 눌지왕의 딸 성국공주를 향으로 치유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바탕으로 아도화상을 기리는 문화행사로 개산 1600년을 맞이한 2017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다.
◆도리사를 통해 신라불교 전래
도리사는 여느 절과 다름없어 평범해 보였으나 경내 중앙에 자리잡고 있어야 할 대웅전이 보이지 않아 당황한다. 조선시대 화재로 소실된 대웅전을 재건하지 않았다. 대신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극락전이 대웅전을 대체하는 '본당'이다. 극락전은 도리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전각건축이다.
극락전 안에는 조선 인조 때 조성한 목조 아미타여래좌상과 아미타후불 탱화가 모셔져있다. 앞면 옆면 모두 3칸 규모로 옆에서 볼 때 여덜 팔(八)자 모양이 두드러진 팔작지붕으로 경복궁 근정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조선시대 후기 건축양식을 드러낸다.
봄기운이 완연하던 2월 말 도리사를 찾았을 땐 극락전 뒤편 자리한 매화꽃이 활짝 꽃망울을 머금기 시작한 모습이 새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는 듯 경외로웠다. 그렇게 도리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한 신라불교는 신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호국(護國)불교로 삼국통일을 완성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극락전 바로 앞에는 '화엄석탑'이 있다. 나지막한 높이의 석탑은 고려시대 양식이다. 5층석탑인 화엄석탑은 세로로 긴돌을 연속으로 기단을 쌓아놓고 1,2층을 작은 돌을 벽돌처럼 쌓아 올린 독특한 양식으로 맨 위에 연꽃을 새긴 보주를 얹었다. 우리나라 다른 석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석탑이라 보물로 지정돼있다. 그저 절에 있는 탑이라고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자세히 보면 잘 보인다.
도리사가 참선을 하는 선방(禪房)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태조선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극락전 바로 옆에 자리한 태조선원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선방으로 정면 7칸, 측면 8칸 규모의 'ㄷ'자형 건물이다. 내부에는 1931년 조성된 석가모니불이 봉안돼있으나 일반인들의 참관은 허용되지 않는다. 야은 길재선생도 이곳에서 스님들에게 글을 배웠다고 하며 성철 스님도 이곳에서 정진했다.
◆야은 길재선생도 도리사서 수학
정면에 걸린 '太祖禪院'이라는 편액은 3.1운동 당시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오세창의 전서체(篆書體)로 이곳이 선(禪) 수행에 정진하던 수행자들의 도량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아도는 단 한사람의 구도승이 아니었다. 미추왕대에 고구려 승려 아도(我道)가 왔고. 눌지왕 때 묵호자(墨胡子)가 왔고 그 직후 묵호자와 모습이 비슷한 아도(阿道)가 모례네 집에 왔다. 수많은 구도자들이 와서 신라에 불교를 전한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간 국경이 분명하지 않았던 당시 변방의 선산(善山)은 구도자들이 숨어들기에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머리를 빡빡 민 낯선 서역 구도자들은 신라인에게 경외롭고 성스러운 존재 그 자체였다. 그래서 당시 이 지역 호족 모례가 보호해준 것이다.
桃李山前桃李開 도리산 앞에 복숭아꽃 오얏꽃이 피었는데
墨胡已去道士來 묵호자는 이미 떠나고 아도가 왔네
誰知赫赫新羅業 누가 알리요? 빛나던 신라의 업적
終始毛郞窨裏灰 모례의 움집 속엔 재뿐인 것을
조선 전기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한 점필재 김종직도 아도화상을 추모했다.
극락전 앞 숲길에 내려서면 아도화상이 수련했다는 좌대와 아도화상사적비 등을 만나는 명상길을 걸을 수 있다. 아도화상 사적비는 거대한 자연암석을 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직사각형 구멍을 파서 세운 형태라서 이채롭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대표) 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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