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세계사] 알파벳의 기원 페니키아 문자…이집트 상형문자 후예

입력 2024-09-25 12:33:02 수정 2024-09-25 12:44:53

알파벳의 진화도. 맨 오른쪽에 이집트 상형문자, 그 왼쪽에 원시 시나이 문자, 그 왼쪽에 페니키아문자 계통을 거쳐 페니키아 문자가 많은 서영 문자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요르단 국립박물관
알파벳의 진화도. 맨 오른쪽에 이집트 상형문자, 그 왼쪽에 원시 시나이 문자, 그 왼쪽에 페니키아문자 계통을 거쳐 페니키아 문자가 많은 서영 문자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요르단 국립박물관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한글이 알파벳(Alphabet)일까? 그렇다. 알파벳 한글은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됐다. 그렇다면 인류 최초의 알파벳은?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알파벳, 음의 기본 단위로 구성된 문자

흔히 알파벳이라면 영어를 적는 문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영어 문자라는 말은 없다. 라틴(Latin) 문자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사용하던 문자다. 476년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은 문자가 없었다. 라틴 문자를 받아들였다. 게르만족 언어인 영어, 독일어 등 오늘날 서양 언어들이 라틴 문자를 사용하는 이유다.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의 첫째 모음 알파(A)와 첫째 자음 베타(B)의 합성어다.

특정한 소릿값(音價, 음가)을 갖고, 모든 소리를 표현하는 부호를 알파벳이라고 한다. 그러니, 자음과 모음 24개(제정 당시 28개) 부호로 모든 소리를 나타내는 한글도 알파벳이다. 라틴문자가 형성된 것은 B.C 7경. 그러니까 2천700여년 된 라틴문자가 오늘날 링구아 프랑카 영어를 적는 문자다. 라틴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그리스 문자는?

우가리트 왕궁 유적지. 현재 시리아 라스 샴라
우가리트 왕궁 유적지. 현재 시리아 라스 샴라

◆ 메소포타미아 문명지 시리아의 비극

중동의 시리아로 가보자. 지금은 내란으로 접근이 어렵지만, 필자가 탐방하던 2000년 여름만 해도 국내 대기업이 들어가 있고, 비자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내전 발생 전이어서 안전에 특별한 위험요인이 없었다. 그때 둘러본 시리아는 70년대 한국의 시골이나 농촌을 연상시켰다. 한적하고 평화로우며 일견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내륙은 무덥고 건조한 사막이지만, 지중해 연안으로는 비옥하고 기후도 좋았다.

시리아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원지 가운데 한 곳이다. 마리를 비롯해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기 인류사를 수놓던 찬란한 역사유적도 여럿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 유적도 마찬가지다. 택시를 대절해 시골구석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다 무더위에 지칠 무렵, 농가에 들러 물을 얻어 마시며 갈증을 풀던 기억이 새롭다. 고향 아주머니와 아저씨 같은 정겨운 인심과 푸근한 분위기의 시리아 국민이 독재자와 강대국의 잇속에 신음하며 내전에 시달려 아수라 속에 살아가니... 정의의 신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쐐기문자의 형태를 빌린 우가리트 알파벳 점토판. B.C14-B.C13세기. 루브르 박물관
쐐기문자의 형태를 빌린 우가리트 알파벳 점토판. B.C14-B.C13세기. 루브르 박물관

◆ 시리아 '우가리트 문자', 인류 역사 최초 전용 알파벳

기독교 역사에서 신의 도시라 불리던 튀르키예 남부의 안타키아(안티옥). 이곳에서 시리아 국경 내부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중해 연안 도시 우가리트(Ugarit)가 자리한다. 현재 아랍어로는 '라스 샴라'로 불린다. 우가리트는 페니키아인이 일군 B.C14세기 유적지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물론 지중해 전역을 상대로 해상교역을 펼치던 페니키아는 단일국가가 존재했던 게 아니다. 글스처럼 여러 도시국가로 나뉘었다. 비블로스, 티레, 시돈, 우가리트... 지역은 시리아와 레바논의 지중해 연안 지역이다.

우가리트어
우가리트어

우가리트 왕궁 유적이 발굴돼 많은 점토판 문서가 쏟아졌다. 이중 눈길을 끄는 유물은 '우가리트 문자' 점토판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중인 '우가리트 문자' 점토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발음의 기본단위 음소를 부호로 만든 뒤, 이를 결합해 소리 나는 대로 적는 인류 역사 최초의 순수 알파벳이라는 점이다. 30개의 음소로 이뤄진 우가리트 알파벳은 일견 쐐기문자처럼 생겼다. 독창적인 생김새가 아니다.

페니키아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교역하면서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를 보고 거기에서 형태를 빌려온 것이다. 마치 고대 일본 사람들이 중국 한자에서 필요한 부분만 따서 음절을 만들 듯, 쐐기문자에서 일부 형태를 따 인류 역사 첫 독자 알파벳을 선보였다. 하지만, 왜 '우가리트 문자'가 후대 지속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알파벳 역사에서 사라졌을까? 편리함을 추구하는 데서 혁신이 나오고, 혁신은 더 편리한 새로운 혁신에 밀린다.

페니키아 문자 비석. 레바논 비블로스 박물관
페니키아 문자 비석. 레바논 비블로스 박물관

◆ 비블로스의 페니키아 문자, 인류 최초 독창적 형태 알파벳

그 새로운 혁신을 찾아 우가리트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자. 국경을 넘어 레바논이다. 레바논은 다른 중동국가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고,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동시에 쓴다. 머리에 히잡을 쓴 여성을 만나기 어렵다. 해안에서 수영하며 저 멀리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눈이 수북하다. 작지만 다양한 면모의 레바논은 티레, 비블로스 같은 고대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의 터전이었다. 수도 베이루트 국립박물관으로 가서 석관 하나를 살펴보자. 박물관 1층 왼쪽 구석에 모셔진 높이 1.4m, 길이 2.97m 짜리 석회암 석관은 일견 투박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반짝이는 어느 대리석 석관보다 빛난다.

아히람왕 석관. 레바논 베이루트 국립박물관.
아히람왕 석관. 레바논 베이루트 국립박물관.
아히람왕 석관 뚜껑에 새겨진 페니키아 문자. B.C10세기. 베이루트 국립박물관
아히람왕 석관 뚜껑에 새겨진 페니키아 문자. B.C10세기. 베이루트 국립박물관

뚜껑에 "구블라(비블로스)왕 이토발이 아버지 아히람을 위해 석관을 만들었다"는 취지의 170 음소(부호), 38개 단어로 쓰인 글이 보인다. B.C 1000년 경 제작된 이 석관 뚜껑 문자는 지금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페니키아 문자다. B.C12-B.C11세기경 해양민족 페니키아인이 만든 페니키아 문자는 22개 자음으로 이뤄졌다.

이집트 상형문자. 요르단 국립박물관
이집트 상형문자. 요르단 국립박물관

원시 시나이 문자. 요르단 국립박물관
원시 시나이 문자. 요르단 국립박물관

페니키아 문자. 요르단 국립박물관
페니키아 문자. 요르단 국립박물관

◆ 놀라운 반전, 페니키아문자 기원은?

페니키아 문자는 인류 역사 최초의 독자적 모델의 알파벳일까? 해답을 얻기 위해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있는 국립 요르단 박물관으로 가보자. 요르단은 1만여년전 유적지와 귀중한 유물이 대거 출토되는 신석기 농사문명 여명기의 보고다. 문자의 역사에서도 페니키아 알파벳의 후예인 아람문자가 널리 쓰이던 지역이다. 요르단 국립박물관 문자 전시실에 가면 페니키아 문자와 이집트 문자 사이에 낯선 문자가 자리한다. 무엇일까?

교역에 종사하던 무역민족 페니키아인의 최대 교역상품은 파피루스다. 무역상대국은 이집트다. 페니키아에서 이집트로 가려면 오늘날 화약고 가자 지구(이스라엘)를 지나 시나이반도에 들러야 한다. 시나이반도는 지금은 이집트 땅이지만, 고대에는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강한 변방이었다. 페니키아인은 시나이반도 사람들이 쓰던 원시 형태의 알파벳을 보고, 이를 모방해 페니키아 문자를 만들었다. 요르단 국립박물관 문자전시실의 페니키아 문자-( )-이집트 문자의 가운데 연결고리는 원시 시나이 문자다.

알파벳인 원시 시나이 문자의 기원이 이집트 문자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중국 한자처럼 하나하나 그림을 그린 뜻글자다. 하지만, 한자와 차이점은 특정 글자는 특정 음가를 갖는 알파벳으로도 쓰인 점이다. 시나이반도 사람들은 알파벳으로 쓰이던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발음과 형태를 따 원시 시나이 문자를 만들었고, 이를 페니키아인이 모방해 페니키아 문자를 완성한 것이다. 결국, 페니키아 문자의 기원은 이집트 상형문자다.

◆ 서양 제(諸)언어 표현 라틴 문자, 페니키아 문자에서 파생

22개의 간단한 부호만 익히면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획기적인 페니키아 알파벳은 급속도로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페니키아 지방 그러니까 레바논을 기준으로 서쪽 그리스로 B.C9세기 경 전파돼 그리스 문자가 탄생한다. B.C8세기 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같은 그리스 문자 서사시가 인류 문학사의 서막을 올렸다.

그리스 문자는 이탈리아 반도의 에트루리아 문자를 거쳐 로마의 라틴문자로 B.C7세기 진화했다. 이 라틴문자가 오늘날 영어, 프랑스어, 독어를 비롯해 서양 모든 언어를 담는 문자다. 그러니 서양문자의 조상은 이집트 상형문자다.

역사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