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일 경북대 교수회 의장
모든 사람은 내 돈이 아닌 남의 돈으로 사업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사업이 망해도 나는 망하지 않는다. 영화 '하트 오브 더 시'를 보면 19세기 초 미국에서 고래 사냥 업자들이 주식회사를 세워서 자본을 끌어모았다. 유전이 발견되기 전에는 석유 대신 고래기름을 사용했다. 고래 사냥은 자본이 많이 들고 위험한 사업이었다.
큰 배와 많은 선원이 필요했고 난파(難破) 가능성도 컸다. 위험한 만큼 수익성은 높았다. 당시 고래 사냥은 '벤처 사업'이었다. 고래 사냥과 주식회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주식회사는 유한책임(有限責任)이다. 내 지분만큼만 책임을 진다. 파산 위험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 대신 경영권과 이윤도 나눠야 한다. 공짜는 없다.
사업 초기에는 주식을 대량으로 발행한다. 자본을 모으고 위험을 분담하기 위해서다. 사업이 잘되면 생각이 달라진다. 잘되는 회사의 경영권과 이윤을 남과 나눌 기업주는 없다. 주식을 매입해서 태워 버리거나 회사채를 발행한다. 회사가 나빠질 조짐이 보이면 기업주는 주식을 현금으로 바꾼다. 돈이 안 되는 회사를 소유할 필요가 없다.
주식회사는 남의 돈으로 사업하기 때문에 상장(上場) 조건이 까다롭다. 회사가 일정 기간 운영됐어야 하고, 매출액과 이익이 일정 금액을 넘어야 한다. 상장 후에도 감독이 심하다. 재무제표, 사업보고서를 공시(公示)해야 한다. 회사의 중요한 결정은 주주총회에서 이뤄져야 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은 진리다. 사람들은 주식회사를 설립하지 않으면서 남의 돈으로 사업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이 한 예다. 거창한 말이지만 풀어 쓰면 '사업 수익성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이다. 물론 수익 실현은 불확실하다. 건설사가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한다.
특수목적법인은 분양(分讓) 수익을 담보로 건설비를 조달한다. 분양 수익이 실현되지 않으면 투자자들이 특수목적법인의 자산을 청구할 수 있지만 특수목적법인은 자산이 별로 없다. 분양이 실패해도 건설사는 망하지 않는다. 미분양 위험을 투자자들에게 떠넘긴다. 결과적으로 건설사는 남의 돈으로 아파트를 짓는다.
'이커머스'는 다른 예다. 이커머스는 온라인에서 소비자와 판매자를 중개하는 사업이다. 소비자가 지불한 금액을 판매자에게 전달하는 '지급결제대행업'이다. 이커머스 회사가 중개 과정에서 남의 돈을 제 것인 양 썼다. 이커머스 회사는 소비자에게 할인이라는 미끼를 던져서 선불(先拂)을 유도했다.
미리 100만원을 내고 110만 포인트를 쓰는 방식이다. 이른바 '선주문 후사용'이다. 이커머스 회사는 소비자가 물건을 구매하는 즉시 판매자에게 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한 달 후에 대금을 지급했다. 한 달치 대금은 이커머스 회사의 자금이 됐다. 이 돈으로 다른 기업을 인수하거나, 은행에 넣어서 이자를 받았다. 이커머스 회사는 소비자 환불(還拂)을 이유로 판매 대금의 20%도 유보(留保)했다. 유보금은 판매자와의 계약이 종료돼야 돌려줬다.
이커머스 회사의 전략은 '받을 돈은 빨리 받고, 줄 돈은 늦게 주기'다. 경영학 교과서에 나오는 전략이다. 물건이 손에 들어오기 전에 돈을 낼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커머스 회사는 소비자에게 할인 혜택을 줬다. 이렇게 하니 매출이 늘었다. 한 달 후 판매 대금을 받아도 판매자가 참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오래가지 못한다.
거래가 증가할수록 이커머스 회사의 손실이 커진다. 파산을 막으려면 계속해서 매출이 증가해야 한다. 이는 불가능하다. 영원히 돌려막을 수는 없다. 예정된 파산이다. 이커머스는 그렇게 설계된 사업이다.
이커머스를 그림자 금융이라고 한다. 금융기관이 아닌데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커머스는 '폰지'와 유사하다. 폰지는 새로운 투자자로부터 돈을 받아서 기존 투자자에게 지급하는 '돌려막기'다. 투자 유입이 줄거나 기존 투자자가 돈을 빼면 폰지가 붕괴한다. 폰지는 모래성이다.
애초부터 수익이 나는 사업이나 자산이 없다. 남의 돈으로 사업하는 기업은 엄격하게 규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파산했을 때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아무 잘못 없는 납세자가 파산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우리는 이런 일을 너무 많이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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