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추위에도 얼지 않는 장백폭포…현지인 승천하는 용 비룡이라 불러
한때 조선인도 뿌리내린 이도백하…어느 겨울에 먹었던 김치 맛 생각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된 백두산(白頭山)
'백두산(白頭山)'은 '흰머리 산'이라는 뜻이다. 한반도에서 지대가 가장 높아 눈이 쌓여 있는 기간이 길고, 산머리가 회백색의 부석(浮石, 화산석)으로 이루어져 희게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천지를 이루는 총 16개의 봉오리 중 가장 높은 곳은 북한령에 속하는 병사봉(兵使峰, 2,744m, 북한 명칭 장군봉)이다.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산은 중국에서는 '창바이산(長白山, 장백산)'으로 부른다. 전체 면적의 ¾이 중국 영토로, 중국은 '중화 10대 명산'으로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올 3월 '창바이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됐다.
도드라진 절경과 태곳적 자연의 신비로움 때문인지 백두산 곳곳에 신화가 일어섰다. 단군신화 속 태백산(백두산)은 천주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내려온 곳이다. 환웅의 아들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고, 부여‧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모두 백두산을 기원으로 건국되었다. 청나라도 자신들의 조상인 여진족의 발상지로 여겨 백두산 일대에 봉금령을 내려 출입을 엄격히 금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장대하고 신성한 기운이 살아 숨 쉬는 백두 곳곳에 스며들어 자연스레 뿌리내리고 일어났다. 누구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누구는 지리를 살피기 위해, 또 누구는 싸울 근거지를 찾기 위해, 또 누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 땅은 사람을 키운다. 사람은 땅의 기운을 받으며 자란다. 백두의 강인한 품에서 나라에 난(亂)이 일거나 주권을 빼앗겼을 때는 서로 뜻을 이루어 봉기했고, 굳은 결의 속에 죽을 각오로 맞서기도 했다.
◆몽환에 든 천지( 天池, 톈츠)
20여 분을 달려 북파 주차장에 내리니 장대비가 쏟아진다. 비옷을 입었지만, 사선으로 퍼붓는 빗줄기와 고산의 낮은 기온에, 급격히 떨어지는 체온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북새통을 이룬 휴게소에서 가까스로 롱패딩을 대여해 입는다. 짙은 안개로 가시거리는 10m도 채 되지 않는다. 멀고 가까움이 가늠되지 않으니, 어디가 능선이고 천지인지 방향마저 구분되지 않는다.
자갈과 부석 잔해로만 이루어진 언저리엔 풀도 나무도 자라지 않아 곳곳에 개울이 졌다. 백두산을 흘러내린 물이 동쪽 원지로 흘러 두만강이 되고 북‧남‧서로 흘러 송화강, 압록강, 흑룡강을 이룬다 하니, 이 작은 실개울로 흘러드는 빗물도 귀하지 않을 수 없다.
퍼붓는 빗줄기에 눈을 뜰 수 없다. 무엇이든 보려고 애쓰지 말자. 자연에 순응하자. 겸허히 받아들이자. 눈을 감으니 아득한 고요가 인다. 백두의 머리에서 맞는 비와 바람과 안개가 어찌 반갑지 않은가. 새하얗게 일어서는 바람을 안갯속에 묻는다. 여기가 백두의 동공, 천지라는 것을 확인 할 만한 건 1983년 여름, 덩샤오핑이 천지를 방문하고 썼다는 '天池(텐츠)' 비석뿐이다.
◆천지의 장엄한 물줄기 장백폭포
장대비는 어느새 안개비로 바뀌었다. 차에서 내리니 암흑의 주상절리가 장엄하다. 사방 천지 화산으로 이루어진 검은 산줄기엔 나무와 풀이 자라지 않아 서늘하고 삭막한 기운이 만연하다. 그 아래 황토물이 거침없이 흘러내린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저 멀리 장백폭포가 우렁차게 쏟아지고 있다. 천지 물이 천문봉과 용문봉 사이로 흘러 거대한 협곡을 지나 68m의 수직 절벽으로 떨어지며 장백폭포를 이룬다. 한겨울 추위에도 얼지 않는, 물줄기의 위엄을 두고 현지인들은 용이 승천하는 모습 같다고 하여 비룡폭포라 부른다. 웅장한 소리, 안개와 운무까지 더해 신비로움은 곱절이 된다. 장백의 물줄기는 송화강과 아무르강을 거쳐 동해로 간다. 비록 천지는 보지 못했을지언정 장엄하게 쏟아지는 천지의 물줄기를 보았으니, 백두의 기운을 충만히 엿본 것 아닌가.
돌멩이 몇 개를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백두의 살점이다. 한반도 천지 산간의 근원인 백두의 신물처럼 영험한 기운이 서린 듯하다. 우리 민족은 우리의 기원이 서린 백두에 불완전한 인간이 가진 고독과 절망의 몸부림을 의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북녘의 땅, 중국 영토가 되었지만, 우리 민족에겐 소망의 산이요, 어려울 때마다 찾아와 빌던 신산(神山)이기도 했다.
길을 보았다. 우리 민족에게 위로와 평화, 때로는 위엄 서린 존엄과 자연의 지상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을. 아직도 곳곳엔 뜨거운 물이 솟구치는 백두산, 그 물에 손을 담그니 백두의 따스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 꽁꽁 얼었던 몸이 혼몽에 젖는다.
비가 많이 왔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 몽환의 세계에 갇혔다 풀려난 영혼처럼 신비로운 감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대자연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용정 시내로 접어드는 그 쨍한 하늘 어디에 커다란 무지개가 걸렸다.
◆백두산 아래 첫 동네 이도백하(二道白河, 얼다오바이허)
백두산 아래 첫 마을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도(二道)는 옥황상제가 터준 두 물길이라는 뜻으로,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송화강 상류의 지류를 말한다. 이도백하는 백두산의 북쪽 기슭 해발 500m 지점에 자리 잡은 연변(옌벤) 조선족자치주 안도현(안투현)에 속하는 조용한 산골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의 거점이 되면서 들썩한 관광도시가 되었다.
백두산 구석구석엔 사람들이 터전을 일구어 살아간다. 한때는 백두에 뿌리내린 조선인들도 적지 않았다. 백두산에 기대 농사와 사냥, 약초와 산나물을 채취하며 삶을 이었다. 조선어를 쓰고 조선의 풍습을 따르며 소박하고 순박하게 뿌리내린 백두산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겨울, 이도백하진에서 먹었던 김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우리의 맛이었다.
날씨가 거칠다. 이도백하의 아침엔 해가 뜨지 않았다. 숙소를 나서는데 먹구름이 빗방울을 흩는다. 웅성거리는 인파, 어디에서 왔든 왜 왔든 모두의 바람은 천지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는 것이리라.
◆백두산 가는 길
버스로 1시간 반 남짓, 북파(北坡) 터미널에 도착했다. 지난 겨울, 폭설로 발이 묶인 곳이다. 이른 시각임에도 많은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 백두산은 눈, 구름, 안개, 폭우, 강풍, 혹한 등이 일상이어서 언제, 어느 때에 올라야 천지가 열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연이 일어서고 스러지는 것을 어찌 인간이 관계할 수 있을까.
천지로 오르는 길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나누어진다. 동파는 북한에서만 오를 수 있고, 서파‧남파‧북파는 중국에서 가능하다. '파(坡)'는 '고개'나 '언덕'을 의미한다. 북파는 천지 가장 가까운 곳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우리의 목적지는 세 번째로 높다는 북파 천문봉(天文峰, 2,670m)이다. 산문 터미널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이동하니 또 다른 환승장에 이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울울창창한 숲이 퍽 인상적이었다. 애써 가꾸거나 벌목하지 않아 스스로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와 그 위를 두껍게 뒤덮은 이끼가 태고의 신비를 더했다.
환승장에 도착하니 멎었던 비가 다시 내린다. 북파로 오르는 S자의 가파른 길을 승합차들이 줄지어 오르내린다. 점점 빗줄기는 굵어지고 안개는 짙어진다. 어렴풋한 능선과 꽃들이 자태를 드러내다 이내 안갯속에 잠긴다.
박시윤 답사기행 에세이작가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세 폐지해라"…이재명 블로그에 항의 댓글 1만여개 달려
장래 대통령 선호도 1위 이재명…한동훈 2위, 尹대통령 지지율 '23%'
탁현민 "나의 대통령 물어뜯으면…언제든 기꺼이 물겠다"
文 “민주당, 재집권 준비해야…준비 안 된 대통령 집권해 혼란”
의료계 "당장 내년 증원부터 백지화하고 2027년도부터 재논의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