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17>추어탕 이야기

입력 2024-08-16 06:30:00

대구·청도식 '추어탕', 남원식 '추어', 서울식 '추탕'
찬바람 불면 생각나는 뜨뜻한 보양식 한 그릇
으깬 미꾸라지·얼갈이배추…대구경북식 본연의 맛 짙어
남원식은 들깻가루로 걸쭉…서울은 육개장 같은 스타일

대구와 청도 등에서 유명한 추어탕은 다른 지역과 달리 오직 얼갈이배추와 으깬 미꾸라지 체즙으로 담백하게 맛을 낸다. 특히 강력한 향을 갖고 있는 제핏가루가 맑은 맛을 더욱 야물게 잡아준다.
대구와 청도 등에서 유명한 추어탕은 다른 지역과 달리 오직 얼갈이배추와 으깬 미꾸라지 체즙으로 담백하게 맛을 낸다. 특히 강력한 향을 갖고 있는 제핏가루가 맑은 맛을 더욱 야물게 잡아준다.

절정(絶頂)에는 '마디'가 없다. 굽이만 있다. 절정의 바닥이 바로 절정의 본질 아닌가.

말벌 독침의 기세로 버티는 이 여름의 절정. 하지만 그 끝이 얼추 보이는 것 같다. 입추가 시작되는 지난 8일 새벽, 어김없이 귀뚜라미가 울었다. 입추의 서늘한 기운이 야음을 틈타, 풀숲에서 대기 중이던 그놈의 수염을 건드려서 그러한 건가.

절정 속에 잘 여물고 있는 가을표 민물 생선탕이 하나 있다. 바로 '추어탕'이다. 추, 그 한자에는 여러 종류의 민물 생선이 깃들어 있다. 鯞(쏘가리), 鯫(뱅어), 鱃(잉어) 등이 있고 나머지 '鰌'와 '鰍'는 모두 '미꾸라지 추' 자이다.

◆추어탕 이름, 지역마다 달라

추어탕 명칭도 지역별로 다르다. 서울식은 '추탕', 남원식은 '추어', 경상도에서는 '추어탕'이라 한다.

추어탕의 원전은 '청계천 꼭지탕'. 꼭지는 서울 청계천 다리 밑 거지 왕초를 의미한다. 꼭지들의 우두머리는 '꼭지딴'. 관과 밀착해 전매사업 삼아 끓이기 시작한 추어탕이 바로 서울식 추탕인 꼭지탕이다. 꼭지들은 때때로 궁궐 내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등과 같은 의료기관에 약재로 쓰이는 뱀, 지네, 두꺼비 등을 잡아 바친다. 포도청은 대신 추탕을 끓여 팔 권리를 주었다.

들깨가루가 많이 들어가는 남원식 추어탕.
들깨가루가 많이 들어가는 남원식 추어탕.

◆추어탕 찾아 삼만리

10여 년 전쯤인가, 한국 추어탕의 족보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과연 한국 추어탕의 명가는 어딜까? 대구를 포함한 경상도의 추어탕이 '본가'(本家)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건 단견이고 편견이다. 도처에 고수가 산재해 있었다. 제주도와 울릉도 등 섬을 제외하면 모든 고향은 자기 방식의 추어탕을 갖고 있다.

청도역전 추어탕 거리
청도역전 추어탕 거리

일단 5대 추어탕 문파(청도‧남원·서울·원주·금산)를 꼽을 수 있다.

청도도 한 추어탕 하는 고장이다. 군청과 청도역 인근에 10여 업소가 산재해 있다. '황토추어탕'은 특이하게 장작가마솥 버전을 사용하고 있다. 그밖에 광복 직후 문을 연 대구백화점 옆 '상주식당', 들안길 '동수미꾸라지', 불로시장 옆 '대구추어탕', 왜관의 '장독대', 경주 '경상도추어탕' 등이 내가 즐겨 찾는 곳이다.

남원·금산·원주도 추어탕 거리를 앞세워 서로 자기가 '한국 추어탕의 본가'라고 자부한다. 남원시는 추어협회를 결성, '전라도식 추어탕 1번지'로 마케팅하고 있다. 춘향제가 열리는 광한루 일원에 50여 업소가 '추어거리'를 형성했다. 가장 먼저 생긴 천거동 남원새집추어탕의 경우 1959년 경남 하동 출신의 서삼례 여사(올해 작고)가 창업했다. 또한 남원시 보절면 도룡리 용평·안평마을은 '미꾸라지 마을'로 지정됐다.

남원추어거리
남원추어거리

원주식 추어탕의 본가는 원주시 개운동 '원주복추어탕'. 다른 곳과 달리 지역 특산물인 인삼을 넣는 곳이 있는데 바로 충북 금산식 '추부추어탕'. 충북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에 가면 중부대학교~마전 종점에 시골, 골목, 둥구나무 등 50여개 업소가 추어탕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형제추탕은 1926년, 중구 다동 용금옥은 1932년, 동대문구 용두동 곰보추탕은 1930년대초에 문을 열었다. 이들이 '서울추어탕 3인방'이다. 모두 일제강점기 때 출발했다. 서울식은 '이걸 추어탕이라 해도 될까'란 의구심이 든다. 소고기 대신 미꾸라지로 끓인 육개장 같달까?

육개장 같은 스타일의 서울식 추어탕
육개장 같은 스타일의 서울식 추어탕

원주식도 특이하다. 잡탕전골·육개장·매운탕 혼합체 같다.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풀어 맑고 개운한 것 같으면서도 무척 뻑뻑하다. 간장 대신 고추장만으로 간을 낸다. 고추장도 찹쌀을 주로 한 경상도식 고추장이 아니다. 고춧가루, 보릿가루, 밀질금 등을 적당량 섞어 만든다.

남원새집의 경우 시래기, 들깨가루, 된장, 간장, 고춧가루, 마늘, 토란대, 고사리, 고구마 줄기 등도 넣어 다소 걸쭉하지만 대구식은 동치미 국물처럼 담백하고 맑다. 남원식은 시래기가 주재료로 들어간다.

대구‧경북식은 미꾸라지 특유의 향기가 다른 데보다 더 짙다. 삶아서 으깬 미꾸라지를 주재료로 사용한 탓이다. 단배추(단으로 묶어 파는 덜 자란 배추), 얼갈이배추 등으로 불리는 청방배추만 사용한다. 우거지용 김장용 포기배추는 추어탕 맛을 되레 죽이기 때문에 사용불가. 우리 지역은 유달리 제핏가루를 선호하지만 부산·경남권으로 가면 방아잎을 좋아한다. 금산식은 인삼이 핵심이다. 청도식은 대다수 미꾸라지 대신 빠가사리, 동자개 등 민물잡어만 사용한다.

부산에는 특이하게 '고등어추어탕'이 인기다. 부산~통영권은 장어탕이 추어탕 대용이다.

팔도 추어탕 촌평을 한다면. 남원추어탕은 솔직히 들깨와 된장이 가미된 '시래기국', 서울식 추어탕은 고추기름, 유부까지 섞여 있어 '육개장' 같았다. 강원도 원주의 추어탕은 '매운탕' 같았다. 전국의 여러 추어탕은 솔직히 미꾸라지를 재료로 끓였다는데 도무지 미꾸라지의 향취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지역의 추어탕 명문

1946년에 문을 연 '상주식당'은 추어탕 명가. 미꾸라지가 휴면에 들고 배추 확보도 힘드는 동절기에는 문을 닫는다. 날이 더우면 강원도 대관령, 태백시 삼수동 고랭지 배추를 사용한다. 추어탕에 가장 어울리는 채소는 결국 30㎝ 남짓한 길이에 어른이 양손으로 감쌀 정도 부피의 청방배추가 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초창기와 달리 단백질 보충을 위해 곱창을 살짝 넣어준다.

경주에는 남다른 근성의 두 업소가 있다. '경상도추어탕'과 '칠불암식당'.

특히 경상도추어탕의 노민식‧노도근 부자는 추어탕과 동고동락한다. 처음부터 추어탕집을 한 건 아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고 그의 집안은 거덜 났다. '탑동기사식당'부터 시작했다. 가을의 그 집 별미가 바로 추어탕이었다. 동네 수로에서 잡아 온 미꾸라지로 탕을 끓였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추어탕에만 집중한다. 공간이 좁아 2003년 현재 자리로 이전.

◆ 미꾸라지 확보의 어려움

중국산 미꾸라지가 등장한 것은 20여년 전부터. 중국에서 100% 양식해서 국내로 들어오는 게 국내 유통량의 거의 90%. 모양은 비슷하지만 무늬가 조금 다르다. 중국산의 경우 보통 식빵에 생기는 검은 곰팡이 같은 게 흩어져 있다. 지금은 한 단계 넘어서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씨알을 거기서 키워서 들어오니 전문가도 잘 구분 못 한다. 2012년부터 정부는 미꾸라지 원산지표시제를 실시한다. 자연산의 산란기는 4~6월. 성어가 되려면 3개월 정도 자라야 한다. 따라서 입추부터 미꾸라지 시즌이다.

미꾸라지와 미꾸리는 같은 속이라 우리말 명칭뿐만이 아니라 생김새도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수염이 길면 '미꾸라지', 짧으면 '미꾸리'. 눕혀서 보면 미꾸리가 미꾸라지보다 더 짧고 둥글다.

추어탕 주재료인 얼갈이배추. 이걸 사용해야 목넘김이 국수처럼 부드러워진다. 심이 센 우거지류를 사용하면 식감이 뚝 떨어진다.
추어탕 주재료인 얼갈이배추. 이걸 사용해야 목넘김이 국수처럼 부드러워진다. 심이 센 우거지류를 사용하면 식감이 뚝 떨어진다.

◆초피와 산초

추어탕집에서 식재료 때문에 언쟁을 벌이는 이들이 많다. 바로 제핏가루를 산초가루로 착각한 탓. 산초와 초피가 헷갈린 이유는 한의학계에서 초피를 산초로 표기해놓은 탓도 있다. 초피의 뿌리, 열매, 줄기 등을 다 구분해서 사용하면서도 정작 표기는 산초로 해놓았기 때문이다. 산초와 초피는 수출 품목에서는 동일한 품목으로 보지만 완전히 다른 종. 가시 모양을 보고 구별할 수도 있다. 가시가 마주 보며 달린 건 초피, 어긋나면 산초다. 초피는 9월 말에 열매가 다 익는다. 알은 검고 껍질은 불그스름하게 시들어간다. 산초는 10월말~11월 초 열매가 다 익는다. 초피나무를 경상도에서는 일명 '제피나무'라 하는데 산초와 달리 속 열매보다 알싸한 맛을 내는 껍질만 빻아서 사용한다. 하지만 산초 열매는 기름용으로 사용되는 데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해서 한때 수출 효자상품이었다. 주산지는 경남 거창과 함안 등 지리산 이남. 지리산 너머 서울 경기권은 산초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