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가수, 방송에서 책 소개하거나
공항 패션 대신 '공항 책' 주목 받기도
혼자 즐기는 고리타분한 취미 벗어나
SNS 적극 공유하는 ‘멋있는 문화’로
"당신은 지난 1년 간, 몇 권의 책을 읽었나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 국민 독서실태'에 따르면 지난해(2022년 9월~2023년 8월) 성인의 종합 독서율은 43.0%로 조사됐다. 이 말은 '1년 간 책 한 권이라도 읽었다'고 답한 비율이 43%에 그쳤다는 것. 바꿔 말하면, 성인 10명 중 6명은 연간 책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종합독서율이 10년 간 계속 감소하고 있는 추세 속, 최근 도서계를 갸우뚱하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지난달 26일부터 닷새간 열린 '2024 서울국제도서전'에 무려 15만명의 관람객이 몰린 것. 독서 인구는 줄어드는데, 도서전 방문객은 지난해(13만명)보다 15% 늘었다고 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공항 패션보다 공항 책?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은 최근 독서 트렌드가 '혼자 조용히 읽는' 것에서 '자랑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싶지만, 이미 신조어도 생겨났다.
'텍스트힙(Text Hip)'은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세대) 사이에서 트렌드가 됐다. 말 그대로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와 '개성 있는, 멋있는' 의미의 '힙하다'를 합한 것으로, SNS에 자신이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공유하거나, 책의 일부를 찍은 이미지를 올려놓거나, 도서와 관련된 모임이나 행사에 참석해 인증샷을 남기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고리타분한 취미이자 비주류로 여겨졌던 독서 문화가, 자신을 멋있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는 것.
특히 이러한 트렌드는 최근 Z세대에게 인기 높은 아이돌 가수들의 영향도 크다. 걸그룹 르세라핌의 허윤진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기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고 필사를 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출국할 때 찍힌 사진에서 '공항 패션'보다 더 화제가 된 것이 바로 '공항 책'. 무심한 듯 시크하게, 한 손에 책 하나 들었을 뿐인데 힙함이 넘쳐흐르는 모습에 Z세대 팬들은 열광했다.
지난 5월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걸그룹 아이브의 장원영도 "최근에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었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적인데 그런 부분에서 위로 받는 게 있었다"며 "독서를 좋아한다. 책 사는 것도 힐링이고 읽으면서 배우는 것도 좋다"고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이 영상이 공개된 이후 20대의 해당 도서 구매가 전월 대비 2.1배 급상승했다고.
'텍스트힙'이 비록 반짝 트렌드가 될 수도, 보여주기식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낮은 독서율과 문해력이 이슈가 되는 시대에서는 그저 반갑기만 하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번 여름휴가 때는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북캉스를 즐기며 '도파민 디톡스' 해보는 건 어떨지.
◆'일출이 백미' 심야책방
트렌드를 놓칠 수 없지. 주말앤 팀도 '텍스트힙' 열차에 올라타보기로 했다. 마침 부산 기장 아난티코브 내 이터널저니에서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마다 '심야책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
지난달 28일 열린 심야책방에 이 기자와 최 기자가 참여했다. 심야책방은 오후 10시부터 작가 북토크를 시작으로 작가 사인회, 자유 독서 시간으로 진행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영업이 끝난 서점에 고요하게 앉아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밤새 마음껏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지 공감할 테다.
이날은 최진영 작가의 북토크가 마련됐다. 책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모인 50여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작가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몇몇 참여자들은 사인을 받기 위해 작가의 책들을 한껏 가져오거나, 단체 카카오톡방을 통해 궁금했던 점을 묻기도 했다.
2시간 여에 걸친 북토크와 사인회가 끝나고 찾아온 자유 독서 시간. 작가의 얘기를 들으니 그의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소설책 '구의 증명'을 집어들고 푹신한 자리에 앉아 독서를 시작했다. 아니, 한 자리에 앉아 책 한 권을 단숨에 몰입해 다 읽은 게 얼마만인지!
오전 2시쯤 지나자 몇몇 참가자들이 짐을 싸고 떠났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간은 자유.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계속 책에 집중했다.
하지만 오전 3시가 지나자 급격히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배도 고프고, 졸음이 몰려왔다. 이곳의 편의점 등 상점은 오후 11시에 문을 닫기에 미리 음료나 간식을 사가는 것이 좋다.
오전 5시, 곯아떨어진 이 기자를 최 기자가 깨웠다. "선배, 해 떴어요."
창 밖을 보니 분홍빛의 하늘이 환상적이다. 어느덧 서점에 남은 사람들도 너다섯명뿐. 그림 같은 일출을 보며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비몽사몽 대구로 돌아오며 우리는 한 여름 밤의 꿈을 꾼 듯하다는 얘기를 나눴다. 고요한 여름 밤, 다양한 이야기들이 한가득 담긴 공간에서 신비한 경험을 한 느낌이랄까. 요즘 책을 읽을 여유가 없다고 느꼈거나, 잘 읽히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면 '심야책방'을 추천한다.
물론 심야책방에 다녀온 사진은 SNS에 올렸다. '텍스트힙', 어렵지 않은데?
◆이색 독서모임 어때요
혼자 책 읽는 게 쉽지 않다면, 독서모임도 추천한다. 소소하지만 재밌는 방식의 이색 독서모임이 곳곳에 있다.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이 진행하는 '카톡 독서 토론'은 얼굴을 맞대고 하는 기존의 토론 개념을 깼다. 독서와 반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온라인 매체 환경을 거부하기보다, 오히려 그 환경 속으로 책과 함께 들어가기로 한 것. 카카오톡 메신저를 통해 진행하는 독서 토론은 직접 한 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전국 단위 독자들은 물론, 해외 동포들도 참여하며 공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모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직장이나 육아 등으로 모임에 쉽게 참여할 수 없는 독자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고.
▷포항에 위치한 '달팽이서점'에서는 '혼신의 희곡 읽기'라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박근형, 장진, 김광림 등 다양한 극작가들의 작품을 들여다보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희곡 한 편을 정해 각자 배역을 맡은 뒤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읽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상 초면인 사람들끼리 모여 발연기의 향연이 펼쳐지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최우수 연기자를 뽑아 선물을 주기도 한다.
▷'체험독서' 모임도 있다.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그 책을 느껴보는 것. 예를 들면 조선의 역사와 관련한 책을 읽고 곧바로 궁궐 해설사를 따라 고궁을 산책하는가 하면, '싯다르타'를 읽은 뒤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고,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그림과 편지들'을 읽은 뒤 관련 전시를 감상하는 식이다.
이 기사를 읽고 난 이번 주말에는 잠깐이라도 스마트폰 대신 책을 들여다보게 되길. SNS 자랑용이라도 상관 없다. 어쨌든 책을 펼치는, 마음에 드는 구절을 찾아내는 그 순간만은 오롯이 책과 내가 마주하는 시간이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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