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아마르티아 센 지음/ 김승진 옮김/ 생각의힘 펴냄
1998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고 '가난하고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옹호자', '경제학계의 양심'으로 불린 아마르티아 센. 그의 연구는 기근, 인간 개발 이론, 후생경제학, 빈곤 메커니즘, 젠더 불평등, 정치적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하다. 대차대조표와 무역 거래 또는 GDP에 집착하며 효용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경제학에서 벗어나 '인간의 좋은 삶'을 위한 경제학으로 커다란 방향 전환을 이룬 그의 사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 책은 빈곤, 격차, 불평등에 주목하며 경제학은 물론, 철학, 정치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족적을 남긴 센이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과 사람들, 그리고 시대에 대한 고찰을 담은 회고록이다. 경제학자의 지위를 다지기까지의 전반 생을 중심으로 술회하며 훗날 그가 추구하게 되는 학문적 관심사와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책에서 드러나는 센의 삶의 궤적은 세계 근현대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유소년 시절에 목격했던 벵골 대기근 사망자들과 힌두-무슬림 간 종교 분쟁의 희생자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본 채플 벽에 빼곡하게 새겨진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트리니티 칼리지 학생들의 이름들 등.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종교라는 이유만으로, 국가 간 대립에 휘말려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이들은 센의 인생 곳곳에 존재했다. 그는 약육강식의 냉혹한 역사 속에서 고통받는 약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센이 목격한 종교 분쟁의 희생자였던 카데르 미아는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일거리를 찾으러 위험을 무릅쓰고 적대적인 지역을 찾았다가 살해당하고 만다. "빈곤은 살해당할 위험이 굉장히 높은 상황을 무릅쓰지 않을 자유도 포함해 모든 종류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었다."(책 200쪽). 센은 자유의 박탈이 부른 비극을 해결하는 방법 역시 자유에서 찾는다. 기근의 원인을 분석한 연구를 통해 그가 발견한 기근 퇴치의 필수적 요소는 바로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였다. "자유로운 언론이 있다면 기근이 시작되었을 때 언론이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리게 될 것이고, 민주적인 투표 제도가 있다면 기근 시기나 기근 직후의 시기에 집권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기근을 지체 없이 해소하려는 인센티브를 갖게 된다."(책 262쪽). 실제로 인도는 영국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언론을 갖게 된 이후 더는 기근 피해를 입지 않는다.
센이 회고록을 집필하던 당시인 2021년에도 알카에다, IS, 강력한 반유대주의, 중동과 아프리카 난민에 대해 조직적인 적대를 표출하는 이슬람 혐오 집단 등 종교 정체성 기반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종교 정체성뿐만 아니라 정치 성향, 젠더, 지역 갈등 등으로 양극화돼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돌리며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전 세계적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곧잘 인간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어 쉽게 재단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복수의 '집'(정체성)을 가질 수 있으며, 누군가의 정체성을 하나의 범주만으로 가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 센의 입장이다. "본국, 시민권, 거주지, 언어, 직업, 종교, 정치 성향, 그 밖에도 수많은 정체성은 우리 안에서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고 그 정체성들 모두가 우리 각자를 자기 자신이 되게 해준다."(책 554쪽).
정체성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관용적으로 만들고 좋은 삶에는 자유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온 생애에 걸쳐 증명했던 아마르티아 센의 메시지는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648쪽, 3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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