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재봉 칼럼] 미국 민주주의의 타락

입력 2024-06-09 17:32:38 수정 2024-06-09 19:20:51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열흘 전 전직 대통령이며 2024년 대선에서 야당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이 확실시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가 형사재판에서 34개 혐의에 대한 유죄 평결을 받았다. 이번 평결은 역사적으로, 법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중범죄 유죄 판결을 받은 전직 대통령이다. 그뿐만 아니라 만일 그가 오는 11월 대선에서 당선된다면 미국 역사상 최초의 범죄자 대통령이 된다.

법리적으로도 이번 평결은 중요한 판례를 남겼다.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6주간 진행된 재판에서 사건 배심원단 12명은 만장일치로 트럼프의 회계 부정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뉴욕주법에 의하면 회계 부정은 경범죄다. 그러나 뉴욕주법에 따르면 경범죄라도 다른 중범죄를 저지르거나 은폐하기 위해서 저지른 것이라면 그 자체가 중범죄가 될 수 있다.

뉴욕 맨해튼 지방검찰청은 트럼프가 성인영화 배우 출신인 스토미 대니엘스와 성관계를 맺은 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입막음용으로 대니엘스에게 13만달러를 주었으며, 이를 감추기 위해 장부상으로는 변호사 비용으로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니엘스가 트럼프와의 스캔들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미국의 유권자들은 알권리를 박탈당했고, 이는 결국 2020년 대선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장부 조작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 선거에 불법적으로 개입한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맨해튼 지방검찰청이 경범죄를 중범죄로 전환시키는 데 사용한 법리적 연결 고리가 거의 사용된 적이 없는 사문화되다시피 한 법조문이다. 이미 수년 전 미국 연방검찰의 맨해튼 남부지청은 이 사건의 기소를 포기한 바 있다. 법리적 기초가 약하고 이미 공소시효도 지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뉴욕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절대적으로 강세인 지역이고, 따라서 뉴욕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근본적으로 반트럼프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평결 직후의 모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트럼프의 유죄 판결이 트럼프 지지율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가 중범죄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유권자는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지층은 더욱 강하게 결집하고 있다.

트럼프는 오히려 자신이 재판에 회부된 것은 정적을 제거하려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사주를 받은 미국의 법무부가 꾸민 가짜 재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바이든의 '파시스트 정권'이 자신과 같은 전직 대통령도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꾸며 공격할 수 있다면 미국 시민 그 누구도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당선되어야만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유죄 판결이 나오기 무섭게 지난주부터 현직 미국 대통령이며 2024년 대선에서 재선에 나서는 바이든 대통령의 아들 헌터 바이든의 총기 불법 소지 혐의에 대한 형사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미 6년 전부터 혐의가 제기되었지만 2020년 대선 당시 트럼프와 벌인 대선 토론에서 바이든은 이 문제가 러시아의 가짜 뉴스 조작이라며 극구 부인한 바 있다. 유죄 판결이 날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바이든 지지층으로 하여금 바이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하고 있다는 조짐은 없다. 82세로 이미 미국 역사상 최고령의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대한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바이든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미국의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논리로 바이든 재선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결집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고물가, 범죄율의 급격한 증가, 멕시코와의 국경 붕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내우외환에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미국 대선이 유권자들에게 제시하는 선택지는 너무나도 제한적이다.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 비서관이었으며 월스트리트 저널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누난(Peggy Noonan)은 오늘의 미국 정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미국 정치의 비극은 위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성이나 지성에서 뛰어나기는커녕 창피스럽기까지 할 뿐만 아니라 유권자의 3분의 2가 대통령 후보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두 명의 노인이 너무나 많은 것이 걸린 이 중대한 역사적 순간에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지도자로 선택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타락을 목격하는 것은 걱정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