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강한 제도였다.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었다. 지난 200여 년간 세계 민주주의는 3차례의 물결을 일으키며 줄기차게 전진해 왔다.(S. E. Huntington) 하지만 놀랍게도 21세기 들어 민주주의가 역진하고 있다. 미국 프리덤 하우스에 따르면, 2023년 52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21개국은 좋아졌다.
지난 18년 동안 글로벌 민주주의는 후퇴를 거듭했다. 미국, 이스라엘,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같은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상황도 매우 우려스럽다. 22대 국회의장 선출을 둘러싸고 일어난 더불어민주당의 최근 사태는 심각한 경고등이다. 우리나라는 국회법 제15조에 따라 국회의장을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 선거하고, 재적 의원 과반수의 득표로 당선된다.
이런 절차에 따라 지난 22년간 국회의장은 원내 제1당 최다선 의원이 맡는 관례가 뿌리내렸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헌법상 누구나 국회의장이 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다수당 출신 중 정치적 경륜이 뛰어난 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문제는 선거에 참여하는 국회의원의 자율성이다. 의장 후보나 일반 의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헌법기관이다. 그리고 헌법 제46조 ②항에 따라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 그게 우리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다. 그런데 의원들이 헌법 규정보다 당대표의 결심에 따르면 어떻게 될까? 이번 국회의장 선출 과정에서 공공연히 그런 일이 벌어졌다.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선출 과정에서 6선의 추미애 후보는 "이재명 대표가 나에게 잘해 달라고 말했다"며 명심(明心)을 내세웠다. 심지어 "당심이 명심이고 명심이 민심"이라는 명비어천가까지 불렀다. 그러자 경쟁하던 조정식 의원, 그리고 친명 좌장 정성호 의원이 후보를 사퇴했다. 앞서 박찬대 원내대표도 명심으로 결정됐다. 그 결과 경쟁 후보도 없고, 후보 토론회도 없어졌다. 그런데 "국회의장까지 당심과 명심이 개입해서 정리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박수현 당선인)
22대 총선 때 이 대표에 반대한 민주당 의원들은 모두 공천 탈락했다. 이 대표에 반하려면 정치생명을 걸어야 한다. 누가 감히 이 대표에 맞서겠나. 국가 서열 2위의 국회의장도 그가 결정한다. 헌법 위에 있는 셈이다. 이재명 대표는 사실상 '여의도 대통령'이다. 민주당 당선인 총회 때 이 대표는 "우리는 한 개개인이 아니라 민주당이라는 정치 결사체 구성원"이므로 "당론을 무산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찬대 의원도 "이 대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민생 과제와 미완의 개혁 과제를 빠르게 추진하겠다"고 충성 선언했다. '명심'에 반하면 개딸들이 떼 지어 물어뜯는다. 정당 민주주의는 죽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지난 5월 17일, 우원식 의원이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됐다. 민주당의 원내 민주주의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강성 당원들이 우 의원 선출을 "(배신자인) '수박'의 쿠데타"라고 비난했다. 또 찬성자 89명을 색출하고, "앞으로 모든 투표는 기명투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원들에게는 '당원입니다. 의원님께서는 부결입니까? 가결입니까? 의견 표명해 주세요. 다음에 심판하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딱 사이비 종교의 이단 심판이다. 그런데도 정청래 최고위원은 "나라 주인이 국민이듯 민주당 주인은 당원"이라며 옹호했다. 마치 민주주의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국익과 양심을 가장 위에 두었다. 이견을 조금도 못 참고, 편향 확증과 증오로 똘똘 뭉친 팬덤 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자 전체주의로 가는 길이다.
이제 민주주의는 연약한 제도다. 쉽게 공격받고 훼손된다. 심한 경우 민주주의의 붕괴(democratic breakdown)가 일어난다. 방법도 세련됐다. 20세기에는 탱크가 거리로 진격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투표장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사람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표를 한다. 그리고 합법적이지만 헌법 정신에 반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가 죽어간다. 대부분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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