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밸류 체인의 중심 대만, 무서운 성장의 배경은? [반도체 강국의 미래] <상>

입력 2024-05-05 18:30:00 수정 2024-05-09 08:24:38

경쟁이 아닌 지원에 초점을 맞춰

TSMC 타이난 공장. 연합뉴스
TSMC 타이난 공장. 연합뉴스

지난해 대만 상위 100대 기업의 시가총액이 한국을 추월했다. CEO스코어가 2013년과 2023년 두 국가 100대 기업의 실적을 조사한 결과, 최근 10년간 한국 100대 기업의 시총은 88.9% 늘어나는 데 그친 반면 대만 100대 기업 시총은 205% 급증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한국은 18.8% 줄었고 대만은 136.6%나 뛰었다.

반도체 기업의 성과에 희비가 엇갈렸다. 각국의 대표 기업인 TSMC는 역대급 실적을 기록한 반면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 침체로 어려움을 겪었다. 시총 비중이 가장 높은 업종은 'IT·전기전자'로 동일하지만 한국은 15개 기업(48.9%)에 대한 집중도가 높았고, 대만은 61개 기업이 77.4%의 점유율을 보였다.

대만은 반도체 산업 밸류체인(가치사슬)의 중심 역할을 하며 세계 첨단산업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CEO 스코어 제공
CEO 스코어 제공

◆ 정부가 주도한 TSMC 설립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인 TSMC는 대만 산업 발전을 주도한 기업으로 꼽힌다. '대만적체전로제조고분유한공사'(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정부 주도로 설립된 기업이다. 1987년 반도체 산업 진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해 이후 민영화를 추진했다.

당시 대만 정부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지낸 모리스 창에게 TSMC의 사령탑을 맡겼다. 모리스 창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사업 모델을 제시했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생산에 특화된 '순수 파운드리'를 만드는 데 승부를 걸었다. 생산·설비 투자에 대한 부담으로 반도체 산업 발전이 늦춰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객사의 의뢰를 받아 생산을 전담하는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생산시설을 보유하지 않더라도 반도체 설계에 특화된 기업들이 급격히 성장했다. 엔비디아, 브로드컴, AMD, 마벨 등 첨단 산업을 이끄는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 기업이 대거 등장했다. TSMC는 이들 기업의 생산을 맡아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TSMC의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4분기 기준 61.2%로 2위인 삼성전자(11.3%)와 큰 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TSMC를 중심으로 한 분업화는 반도체 산업 성장의 기반이 됐다. 현재도 대만 정부는 반도체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시행한 '대만형 칩스법'은 R&D 투자액과 첨단 공정용 설비투자에 대해 법인세를 감면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범부처 차원의 '국가반도체발전전략'도 수립 중이다. 인재 양성·확보, 공급망 자율성, 에너지 정책의 경우 업계와 의견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 반도체 밸류체인.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제공
대만 반도체 밸류체인.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제공

◆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분업화에 초점

TSMC 외에도 파운드리 분야에 UMC, PSMC(파워칩)등 유망 기업이 성장을 거듭했다. 이 가운데 UMC는 세계 시장 점유율 3위에 해당하는 파운드리 기업으로 초미세 공정이 적용되지 않는 분야의 수요에 집중했다. 최근 미국의 인텔과 손잡고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후공정의 경우 글로벌 1위 패키징·테스트 기업 ASE 그룹이 있다. 컴퓨팅, 모바일, 네트워크, 가전, 차량 등 적용 범위가 넓다. 첨단 패키징에서 최종 테스트까지 한 번에 수행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한다. AI(인공지능) 기술이 성장하면서 관련 반도체를 생산하는 과정에 고도화된 패키징 기술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는 추세다. ASE도 패키징 생산능력을 확대해 대응력을 높이고 있다.

이밖에 팹리스 분야에서도 스마트폰 프로세서 AP를 설계하는 미디어텍과 네트워크 칩셋에 특화된 리얼텍 등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TSMC가 확립한 사업 모델에 맞는 전략을 수립했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TSMC의 사훈은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영향을 미쳤다. 화합물 반도체 파운드리 윈세미 관계자는 "경쟁이 아닌 지원에 초점을 맞췄다. 파트너와 신뢰를 쌓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한국정보통신기획평가원은 "한국과 대만은 반도체 산업을 집중 육성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대만의 상승세가 현재 뚜렷한 상황"이라며 "대만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에 업계의 대외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이 더해져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