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순종 황제의 두 번째 죽음

입력 2024-04-24 20:30:00

이태진(전 국사편찬위원장)
이태진(전 국사편찬위원장)

지난 22일 저녁에 의친왕기념사업회 이영주 사무총장이 다급하게 문자를 보내왔다.

"교수님, 방금 순종 황제 할아버지 발목을 자르고 크레인으로 철거해 버렸습니다. 거열형입니까, 교수형입니까. 융희 황제께서는 평생 일제에 농락당하고 가신 분인데 이렇게 다시 대구가 농락합니까."

40대 중반의 이영주 씨는 내가 급히 써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임시킨 순종 황제의 순행'을 들고 신문사 20곳을 찾아 게재를 부탁하고 대구 철거 현장을 지켜보다가 끝내 통곡했다. 역사학자로서 바른 역사상을 국민에게 전하지 못해 이런 처참한 현장이 벌어진 것에 책임감을 통감한다.

언제부턴가 고종, 순종을 망국의 '원흉'으로 몰아 제멋대로 농단하는 풍조가 일고 있다. 두 황제가 일제에 놀아난 군주라면 어떻게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여 일어난 3·1 독립 만세운동과 6·10 만세운동의 역사가 있었겠는가?

순종 황제가 남쪽으로 마산, 북쪽으로 의주까지 찾아간 순행(巡幸) 행사에서 대구는 첫 행재소(行在所)였고, 또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구를 찾은 것은 특별한 까닭이 있었다. 그 사연부터 살펴보자.

1909년 1, 2월의 순종 황제의 전국 순행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구상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순종은 결코 그에 굴종해 나선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이토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싸웠다. 이토는 의병 진압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토는 이 저항을 진정시켜 보려고 순종 황제에게 기차를 이용한 순행을 제안했다. 내가 황제를 잘 모시고 있다는 것을 보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남쪽으로 가는 순행은 1월 7일 남대문 정거장을 출발, 오후에 대구에 도착해 1박하고 8일부터 11일까지 부산, 마산을 순방한 뒤 11일 대구로 와서 다시 1박하고 12일 상경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황제 일행이 도착한 정거장에는 공사립 학교 학생을 비롯해 시민들이 길을 메웠다. '황성신문'은 환영 인파의 수가 대구 수천, 부산에서는 항구를 가득 메우고 마산에서는 3만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9일 오전 마산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황제를 기함 아쓰마(吾妻)함으로 안내했다. 일본의 해군력을 과시하기 위한 행사였다. 이때 항구의 시민들이 5~6척의 배를 달려 황제가 탄 전마선을 둘러싸고 호위하면서 큰 소리로 "폐하가 만약 일본으로 가시면 신들은 일제히 바다에 뛰어들어 죽겠으며 차마 우리 임금이 포로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라고 외쳤다. 순종이 이토에 굴종하는 비굴한 황제였다면 어찌 이런 눈물겨운 광경이 벌어졌겠는가?
12일 부산을 떠나 상경하면서 황제는 대구에 도착하자 바로 달성공원으로 가서 각 학교 운동회를 직접 보고 관찰사를 비롯한 관리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교육과 실업 장려에 쓸 돈 7천원을 하사했다. 1897년 독립협회 창설 때 왕실이 낸 3천원의 배가 넘는 액수다. 황제가 대구를 두 번이나 찾아 은사(恩賜)를 표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나라가 부당하게 진 빚을 갚는 것이 국민의 의무라고 부르짖은 국민 탄생의 역사는 세계 역사에 예를 찾기 어렵다.

순종 황제는 몇 달 전까지 계속되었던 이 운동의 진윈지 대구에 감사를 표하고자 두 번이나 이곳을 찾았다. 일제에 맞선 대구 시민에게 감사하는 눈물의 방문이었다. 이런 황제를 이토 히로부미의 꼭두각시로 보다니, 표피의 역사 지식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아마추어리즘, 제발 이제는 그만 멈춰주기를 바란다.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8일간 이뤄진 서순 때도 연도의 국민은 황제에게 환호를 보냈다. '황성신문'은 평양과 개성의 환영 인파가 10만이라고 보도했다. 황제와 국민이 연출한 뜨거운 역사를 발로 걷어차는 대구시, 너무도 당혹스럽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