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선문화관을 돌아보고서

입력 2024-04-25 11:14:22 수정 2024-04-25 19:00:47

이무열 시인(대구문화관광해설사 회장)

이무열 시인(대구문화관광해설사 회장)
이무열 시인(대구문화관광해설사 회장)

전선문화관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대지바' 건물은 3년 전 건물주에 의해 당장이라도 철거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구시에서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원도심 근대건축물 보존을 위해 애쓴 결과 전선문화관으로 거듭났다. '대지바'는 대지 술집이나 대지 스탠드바를 이르던 이름인데, 1950~1953년 전쟁 당시 대구로 몰려온 유명 문화예술인들이 시름을 달래며 문화예술을 꽃피운 장소 중 하나다.

당시 문총구국대를 비롯해 국방부 정훈국 소속 육군의 종군작가단과 공군의 창공구락부 문인들은 민심 순화를 위한 문인극을 공연하거나 전선을 취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는 등의 진중 활동을 펼치곤 했다. 특히 서울에서 내려온 피난 예술인들로 인해 대구는 한때 한국 문단의 중심이었다. '대지바'를 비롯해 술집과 식당과 다방이 줄느런하던 향촌동에서는 바흐와 베토벤 음악이 흐르고, 비록 전쟁 상황은 암담하고 사람들은 궁핍했지만 '폐허에서 바흐를 듣는다'고 외신에 보도될 정도로 살롱 문화가 번성하기도 했다.

대지바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박목월, 마해송, 이중섭, 조지훈, 유치환, 구상, 김동리, 박훈산, 김사엽, 박양균, 황순원, 이윤수, 이한직, 최태응, 이효상, 김달진, 이호우, 최인욱, 김상규, 김동사, 김사엽, 최계복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전선문화관 입구 대각선으로 맞은편 건물은 화월여관이었다. 시인 구상과 아동문학가 마해송이 즐겨 애용했는데 지금은 농담 반 진담 반 '60금' 건물이다. 60세 이하 아이들은 나가 놀아라는 우스갯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어르신들의 천국 판코리아 성인텍이 됐다.

화월여관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있던 대지바. 그 중심에 늘 구상 시인이 있었다. 당시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의 주간이었던 구상은 피난 문인들의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종군작가들은 전선을 누빈 경험을 바탕으로 뛰어난 작품을 남겼는데, 구상의 「초토의 시」, 청마 유치환의 「보병과 더부러」, 김동리의 「밀다원시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종군작가 조지훈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낙동강 상류 다부원 체험을 강렬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종군 문인을 조명하는 전선문화관은 대구만의 자산이면서 사라질 건물을 최대한 살려 의미 있는 공간으로 꾸미고자 한 노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앞으로 기존의 대구문학관과 차별화해 전선문화관만의 독특한 콘텐츠를 개발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당시 간행된 책자 중 대표적인 것은 '전선문학'과 '전선시첩'이다.

특히 전선시첩 제3집은 당시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발간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윤수는 3집 원고를 30년 동안 집념으로 품고 있다가 1984년 1, 2, 3집 합본으로 발간했다. LED 미디어파사드의 전선문화 예술인 소개 영상에 이윤수 시인이 빠져 있어 아쉬웠다.

국방부 정훈국장 육군 대령 이선근이 발행한 이윤수의 종군증명서와 노란 바탕에 녹색별과 종군문인·WRITER(작가)라는 글씨를 자수로 곱게 수놓은 어깨 휘장도 같이 전시되면 좋겠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전쟁 속에서 꽃피운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재조명하면서 기존의 골목투어와 문학 로드를 연계한 관광벨트화 조성에 문화관광해설사들이 함께할 그런 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