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파온',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
〈청보리밭〉
이 짐승은 온몸이 초록 털로 뒤덮여 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초록색이어서
눈과 코와 입은 어디에 붙어있는지 모르겠다
초록 짐승은 땅 위에 거대한 빨판을 붙인 채 배를 깔고
검은 밭담이 꽉 차도록 엎드려 있다
이 짐승의 크기는 백 평 이백 평 단위로 헤아린다
크지만 순해서 사납게 짓는 법이 없고
검은 밭담 우리를 넘어가는 일도 없다, 만약
밭담을 말〔馬〕처럼 만든다면 짐승은 초록 말로 자라고
말은 초록 갈기를 휘날리며 꿈속을 달리겠지
바람이 짐승의 등줄기를 맨발로 미끄러져 다닌다
바람의 발바닥에 시퍼렇게 초록 물이 들었다
굽이치는 초록 물결 초록 머리채
짐승은 바람의 안무에 초록 비단 춤을 춘다

<시작 노트>
청보리밭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수평선을 배경으로 둔 곳이 제격입니다. 현무암 밭담에서 자라는 청보리는 검은색과 초록의 대비로 더욱 회화적이지요. 그 위로 해풍이 불어올 때 청보리밭 예술이 완성됩니다. 그때, 밭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 청보리밭의 군무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어요. 살아서 온몸으로 춤추는, 그 신비롭고 황홀한 초록 짐승의 젊은 날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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