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 <246>못 보았을 텐데 재미있게 그린 원숭이

입력 2024-04-18 13:09:31

미술사 연구자

정유승(1660-1738), '군원유희(群猿遊戱)', 종이에 수묵담채, 29.5×47.3㎝,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정유승(1660-1738), '군원유희(群猿遊戱)', 종이에 수묵담채, 29.5×47.3㎝,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장난치며 놀고 있는 원숭이 무리를 그린 18세기 그림이다. 우리나라에 살지 않는 원숭이를 구경하기란 쉽지 않았을 시절이다. 어떻게 각양각색으로 실감나게 그렸을까? 아마 어떤 그림본이 있어서 이 본(本)을 활용하며 상상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꼬리는 한 마리만 짧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정보는 없었나 보다.

겨드랑이를 긁기도, 머리를 문지르기도, 손톱을 다듬기도 한다. 목걸이를 두른 녀석도 있고, 두 마리는 긴 실로 포획한 하늘소 다리를 묶으며 장난치고 있다. 원숭이들의 다채로운 표정이 우스꽝스럽고 몸동작도 저마다 활기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비슷한 그림을 찾기 어려운 특이한 유형의 동물화여서 더욱 눈길을 끈다.

'군원유희'는 취은(醉隱) 정유승이 척재(惕齋) 김보택에게 보낸 작품이다. 글의 앞머리에 이 그림을 그린 사연이 있고 이어서 당시를 써넣었다. 정유승은 김보택이 어딘가로 떠나 거처를 정하고 시간이 좀 흐르자 이별을 노래한 옛 시로 그리운 마음을 전하면서 그림까지 함께 그려 보냈다. 하필 원숭이인 것인 이 시에 원숭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차군차별의하여(嗟君此別意何如) 슬프구나 그대여, 떠나는 마음 어떠할지

주마함배문적거(駐馬銜杯問謫居) 말 매어두고 잔을 들어 귀양살이를 묻네

무협제원삭항루(巫峽啼猿數行淚) 무협의 원숭이 울음소리에 수없이 눈물 흐르는데

형양귀안기봉서(衡陽歸雁幾封書) 형양의 기러기 돌아가며 무슨 소식 가져가나

청풍강상추천원(靑楓江上秋天遠) 청풍강 위로는 가을 하늘이 멀고

백제성변고목소(白帝城邊古木疎) 백제성 가에는 고목이 성글다

성대지금다우로(聖代只今多雨露) 태평성대인 지금은 은택이 많아

잠시분수막주저(暫時分手莫躊躇) 잠시 헤어질 뿐이니 주저하지 말게

시는 당나라 고적이 멀리 무협과 형산으로 각각 귀양 가는 두 친구와 작별하며 지은 시다. 장강의 이름난 협곡인 무협은 험산준령이 하늘을 가려 해가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인적은 없고 원숭이 울음소리만 빈 골짜기에 구슬프게 메아리친다고 한다. 삼국 쟁패의 무대였던 백제성이 있는 곳이고, 백제성은 촉의 유비가 제갈량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숨을 거둔 곳이어서 '원숭이 울음소리'는 시인들의 가슴을 울린 중요한 모티프였다.

정유승은 시를 보내 벗을 위로하면서 구슬픈 원숭이가 아니라 웃음을 유발하는 유희 중인 원숭이로 그려 슬픔을 해학으로 반전시켰다. 정유승은 현감 벼슬을 지낸 양반화가로 포도와 인물, 동물 등을 잘 그렸고, 숙종의 어진을 그릴 때 감조관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으로 알려진 작품이 '군원유희'가 유일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