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 국민연금공단 서대구지사장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이미 종착지가 정해진 운명이다. 나이 듦을 외면하고 죽음을 거부하지만, 결국은 '불굴의 패배'에 직면한다. 오직 한 번뿐인 삶, 어찌 살아야 후회와 미련을 덜 남길까? 삶이라는 캔버스를 풍요롭고 다채롭게 물들이면 어떨까. 호기심 가득하게 심장 뛰는 재밋거리를 찾거나 가슴 벅찬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말이다.
돌이켜 보면 삶은 우연의 연속이고, 우연은 언제나 뜻밖에 찾아온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스물두 번째 국회의원 선거 관리를 위해 유관 기관 참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선거관리위원회의 문서에서 우연은 시작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근무하니 솔깃했지만 최저임금을 살짝 웃도는 적은 수당에 실망했다. '은퇴가 일 년밖에 안 남았으니 다시 없을 마지막 기회! 좋은 건 추억이고 나쁜 건 경험이니, 일단은 하지 뭐.'
긴장 속에 바쁘게 보낸 열네 시간! 공정하고 투명한 투표 관리를 위해 엄숙하게 선서한 순간, 온몸을 휘감는 소명 의식에 아찔한 전율을 느꼈다. 인물과 정당을 선택할 두 장의 투표용지에 투표관리관 직인을 날인하고 일련번호를 절취하여 순서대로 배부하는 업무, 마치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듯 지극히 단순한 일을 무려 천오백 번가량 반복했다. 삶의 방향을 잃고 표류하느라 작업장에서 꼬박 한 달을 보낸 젊은 날이 아련히 떠오르며 온실같이 평온한 지금의 일상에 감사했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여섯 시부터 투표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고 잠시 숨 고를 틈조차 없었다. 한결같이 차례를 지키며 타인을 배려하는 신사와 숙녀의 태도에는 교양과 품격을 두루 갖춘 모범 시민의 향기가 배어 나왔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교부받은 투표용지에 기표하여 투표함에 넣는 모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한 치의 오류나 한 건의 불미스러운 일도 없이.
무심히 스치지 않고 손 닿을 가까운 곳에서 1천 명 이상과 접촉한 건 잊지 못할 추억이다. 지구인이 제각각이듯 투표장을 찾은 유권자의 행태도 사뭇 달랐다. 투표 시작하기 전부터 대기하거나 마감 일 분을 남기고 헐레벌떡 뛰어오거나, 잔뜩 굳은 얼굴에 한 손으로 투표용지를 받거나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으며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하거나, 홀로 오거나 다정하게 함께 오거나, 어느 누구도 질서를 무너뜨리거나 평온을 깨뜨리지 않았다.
투표는 끝났다. 날 선 공방은 한풀 꺾였고 승패는 명확하게 갈렸다.
승자는 득의양양하게 환호를 내지르고, 패자는 거대한 민심의 물결에 하염없이 고개를 숙인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끝은 사뭇 아쉽다. 하지만 영원히 끝난 건 아니다. 선거는 조만간 또다시 있을 것이고 결과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투표의 진정한 승리자는 바로 유권자다. '투표는 탄환보다 강하다'(The ballot is stronger than the bullet)는 링컨 대통령의 말처럼.
첫 사회 참여! 낯설고 힘들었지만 오랫동안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다. 은퇴 이후 새털처럼 많은 날을 어찌 채워갈지 실마리를 찾은 듯하다.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에 기여하고픈 소망에서. 또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환하게 빛날 것을 확신한다. 휠체어를 탄 채 투표권을 행사한 아흔 살 할머니의 담대함에서, 기표소에 함께 들어가자는 어머니의 손짓을 마다하고 대기선 밖에서 의젓하게 기다린 초등학생의 준법정신에서, 희망은 늘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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