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터뷰] 사진 찍고, 환자 얼굴 조각…한기환 전 계명대 동산병원장 '의술과 예술 사이'

입력 2024-03-31 14:13:24 수정 2024-03-31 19:04:24

의료 봉사 다니며 사진 찍고, 직접 수술한 환자 얼굴 조각

윗 입술이 갈라지고 코 한쪽은 내려앉은 얼굴 조각상. 매끈하게 다듬어진 여느 조각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2007년 그는 첫 조소전을 열었다. 직접 수술한 얼굴 기형 환자의 모습을 작품으로 빚어냈다. "환자에게 더 잘 해주지 못한 미안함을 찰흙에 집어넣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났고, 그는 첫 사진전을 앞두고 있다. 이번에는 의료 봉사를 다니며 찍은 생활상이 작품이 됐다. 의술과 예술 사이. 그 어딘가에 서 있는 한기환 전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장을 만나고 왔다. 한 전 원장은 말한다. "의사가 자꾸 외도(外道) 해서 죄송합니다"

한기환 전 계명대 동산병원 원장은 첫 사진전
한기환 전 계명대 동산병원 원장은 첫 사진전 '차창 밖 아시안'을 앞두고 있다. 의료 봉사를 다니며 찍은 생활상이 작품이 됐다. 의술과 예술 사이. 그 어딘가에 서 있는 한 전 원장. 그는 말한다. "의사가 자꾸 외도(外道) 해서 죄송합니다"
한기환 전 계명대 동산병원 원장은 첫 사진전
한기환 전 계명대 동산병원 원장은 첫 사진전 '차창 밖 아시안'을 앞두고 있다. 의료 봉사를 다니며 찍은 생활상이 작품이 됐다. 의술과 예술 사이. 그 어딘가에 서 있는 한 전 원장. 그는 말한다. "의사가 자꾸 외도(外道) 해서 죄송합니다"

-외도(外道)라고 하기엔 모두 의사 생활을 녹여낸 전시들이 아닌가. 직접 수술한 환자의 얼굴을 조각으로 빚어낸 전시, 인상 깊게 봤다.

▶성형외과 의사로 수십 년 동안 얼굴기형 환자를 수술해 왔다. 나아진 모습에 그들이 행복해하면 나도 덩달아 좋았지 , 이들이 겪고 있는 불편·슬픔·고통은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을 찰흙 두상으로 바꾸면서 그마다로 얽혀있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또한 그때에는 주지 못했던 애정과 더 잘 해주지 못한 미안함을 찰흙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기형 환자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행세를 할 수 있는 까닭은 이들에게 이상한 눈길을 주지 않고 손가락질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람들도 이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

한기환 전 원장의 작업실. 왼쪽 모니터에 사진을 띄워놓고 옆 이젤에서 조각 작업을 한다.
한기환 전 원장의 작업실. 왼쪽 모니터에 사진을 띄워놓고 옆 이젤에서 조각 작업을 한다.

-사람을 성형하는 것과 조각을 성형하는 것. 다른 점이 있나.

▶흙은 말이 없다. 환자는 잘 됐니 못 됐니 말을 하지 않는가. 하지만 흙은 내가 어떻게 만들어도 말이 없다. 하지만 닮은 점도 있다. 사람을 수술하는 원칙이 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의사로 쌓아왔던 섬세한 손끝은 흙을 만짐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됐다.

-2007년 조소전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

▶'양가 감정'이라는 작품이 있다. 앞면은 구순구개열(언청이) 환자의 수술 전 모습. 뒷면은 그 환자의 머릿속을 조각해낸 작품인데, 머리 속을 엄마 자궁으로 표현했다. 즉 환자가 엄마 뱃 속에 있을 당시를 형상화한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 테지만 구순구개열은 얼굴이 만들어지는 임신 4~7주 사이에 입술(구순) 및 입천장(구개)을 만드는 조직이 적절히 붙지 못하거나 붙었더라도 유지되지 않고 떨어져서 생기는 입술 또는 입천장의 갈림증이다.

2007년 한기환 전 원장의
2007년 한기환 전 원장의 '의술과 예술' 조소 전시회 속 작품 중 하나. '양가 감정'이라는 제목의 해당 작품은 앞면은 구순구개열(언청이) 환자의 수술 전 모습. 뒷면은 그 환자의 머릿속을 조각해낸 작품이다. 환자 머리 속을 엄마 자궁으로 형상화. 장애를 가지고 엄마 자궁에서 커가던 모습을 조각해낸 것이 인상적이다.

-원장님 업적 중 하나가 계명대 동산병원에 구순열-얼굴성형센터를 설립한 것이더라. 이번에 여는 사진전도 얼굴기형환자들을 찾아 해외의료봉사를 떠났을 당시에 작업한 거라고.

▶그렇다. 의과대 교수 시절 남을 위해 봉사한 해외의료봉사는 보람된 일이었다. 태국,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병원에서 구순열·머리얼굴기형 등을 수술했다. 라오스에 갔을 때는 환자가 무려 300명이나 찾아 왔었다. 그런데 그 300명이 모두 어른이었다. 구순열로 태어나면 거의 대부분 신생아 때 수술을 하는데, 그 수백명의 환자들은 어릴 때 수술을 못 받은 것이다. 해당 분야 성형외과 의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다. 우리가 봉사하러 안 가면 이 환자들은 평생 아픔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우리를 기다릴 환자들을 찾아간다는 마음으로 봉사에 임했다.

-그 바쁜 의사 생활 가운데 매년 봉사를 떠났고, 봉사지에서 사진까지 찍으셨더다.

▶숙소에서 병원까지 미니버스나 툭툭이로 이동했는데 그 사이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내가 사진을 찍는 동안 같이 갔던 의사 4명은 모두 쿨쿨 자더라. (웃음) 그만큼 고된 일정이었다. 수술로 피곤했지만 오가는 길 차창 밖 펼쳐지는 사람들의 삶을 놓칠 수가 없었다. 생생한 삶의 현장을 담을 수 있음에 행복했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차에서 찍다 보니 흔들린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되니 보통 봉사를 나가면 2000장씩 찍어 오는데 그중 마음에 드는 건 몇 점 안 나왔다. 하지만 십년 넘게 봉사를 다니며 매년 사진이 쌓였고, 그 덕분에 이렇게 전시회까지 열 수 있게 됐다.

한 전 원장의 업적 중 하나는 계명대 동산병원에 구순열-얼굴성형센터를 설립한 것이다.
'차창 밖 아시안'. 이달 2일부터 7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한 원장의 사진전 제목이다. 사진은 사진전에 전시된 작품을 담아 엮은 책.

-사진은 언제부터 찍으신 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어린이 카메라를 사다 주셨고, 중학교 시절에는 검은 비닐로 집에 만든 암실에서 인화 작업을 배웠다. 고교 시절엔 무용발표회 장면을 찍기도 하고 사진 촬영대회도 나가봤다. 아버지로 인해 어릴적부터 사진을 접해온 것이다. 사실 의사가 되어 전공 과목으로 성형외과를 택한 이유도 사진 때문이었다.

-성형외과 의사와 사진이 무슨 연관인가.

▶성형외과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진이다. 수술전, 수술중, 수술후 사진을 의사들이 직접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직접 찍은 사진으로 수술 사례를 발표하곤 한다. 레지던트 1년때 카메라를 의무적으로 사야 하는데 나는 사진을 해왔던 사람이니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 독일제 카메라를 들고 가니 과장님이 놀라시더라. 이토록 사진에 진심인 의사는 없었을테니 말이다. '메디컬 포토그래퍼'라는 별명도 그때 붙었었다.

-해외 봉사지에서까지 사진기를 놓지 않다니, '메디컬 포토그래퍼' 다운 열정이다. 사진전도 기대된다.

▶비포장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차안에서 차창을 내리고 촬영하느라 떨림, 노출문제, 부정사각, 부족한 예술성 등의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차창 밖 아시안들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다. 재밌게 봐주길 바란다. 아, 사진에 설명은 따로 없다. 누군가 사진 설명을 기가막히게 달아주겠다는 제안도 해 왔지만 그게 무슨 의미겠냐 싶었다. 스치며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 알겠는가. 만약 내가 제목을 달고 설명을 붙인다면 그건 가짜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보고 각자 느끼는 대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한 전 원장의 업적 중 하나는 계명대 동산병원에 구순열-얼굴성형센터를 설립한 것이다.

-은퇴를 했음에도 아직까지도 매년 해외 봉사를 나가신다고

▶해외 얼굴기형·구순구개열 환자들은 우리만 기다린다. 이 수술은 한번 해서 되는 수술도 아니다. 2차 3차 수술이 필요하다. 3번 수술을 해준 여성 환자가 있었는데, 그 환자는 1년에 한번 씩 세번을 수술한 것이다. 고맙다고 다시 찾아올 때 참 보람을 느낀다. 내나이 70살. 아직까지는 건재하다. 손이 떨려서 수술을 못할 때까지 환자를 돕고 싶다. (웃음)

'차창 밖 아시안' 이달 2일부터 7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한 원장의 사진전이 열린다. 그리고 기자는 생각한다. 우리는 차창 밖 누군가에게 이토록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차창 안에 갇혀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 왔지는 않았던가.

"저도 젊을 때는 돈을 벌기 위해, 명성을 쌓기 위해 수술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다가 아닌 것을 깨달았죠. 환자의 아픔과 가족들의 슬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됐던 순간. 그때부터 나는 진짜 의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 전 원장의 마지막 말이 기자에겐 이렇게도 들렸다. '차창 밖 누군가를 이해하고 연민하는 순간부터가 진짜 삶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