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미당 서정주의 '자화상'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구절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미당은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고 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의 '서시'에도 '바람'과 '부끄러움'이 등장한다.
서정주의 '자화상'과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바람'과 '부끄러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가 낳은 '자화상'과 '서시'에는 시련과 고뇌와 아픔은 물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각성과 연민과 소망과 희망의 정서도 머금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식민지 땅을 할퀴고 지나간 살벌하고 황폐한 바람에도 두 시인이 받아들인 감회와 거기서 배어나는 울림의 결은 다르다.
친일 행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서정주의 회한이 현실적인 죄의식이라면 절대 순수를 지향했던 윤동주의 자각은 순결한 부끄러움이었다. 같은 바람에도 나무에 따라 흔들림이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그 바람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원초적으로 지닌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감성을 움직이는 바람의 동력, 보이지 않는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래서 동서고금의 수많은 시와 노래가 바람을 얘기했다. 영국의 여류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나뭇잎들이 떨리면 바람은 지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보물섬'을 쓴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풀밭을 스치는 여인의 치맛자락 소리처럼. 모든 곳에서 바람이 지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바람은 그렇게 시간과 장소에 따라 오만가지의 모습과 소리로 다가온다.
남진의 트로트곡 '나야 나'의 노랫말 첫구절 '바람이 분다, 길가에 목로집, 그냥 가긴 서운하잖아...'에서 저물녘 퇴근길 발걸음을 주흥(酒興)이 촛불처럼 흔들리는 목로집으로 이끄는 것도 바람이다. 김광석의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로 시작해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로 끝난다. 그렇다면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삶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란 질문과도 상통한다. 그 바람이 시작되는 것은 저멀리 우주공간인가, 아니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인가. 바람은 물리적으로는 나뭇가지를 흔들지만, 정서적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바람은 현상이면서 감성이며 철학이기도 하다. 바람의 속성은 생명력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살아있다는 방증이다.
갈대가 서걱대는 것은, 사람이 울고웃는 것은, 단지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바람과 함께 하려는 공명(共鳴)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낯선 바람 바람아, 덧없는 한세상 답답한 맘을, 너는 달래주려나, 세상에 지쳐 울고 싶은 날, 나는 바람이 되어, 한없이 위로가 되는, 당신 곁으로 가서...' 최근 미스트롯3에서 1등을 차지한 가수 정서주가 부른 '바람 바람아'가 그렇다.
노래는 '낯선 바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만, '세상에 지쳐 울고 싶은 날, 기어이 내가 바람이 되어 당신 곁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 나 또한 바람인 것이다. 풍아일체(風我一體)의 경지이다. 예사롭지 않는 노랫말이다. '선풍기가 시원하지 않은 것은 그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때문이며, 자연 바람이 시원한 것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의미있는 말도 있다.
우리가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 열다섯 소녀 가수의 나직한 '바람' 노래에 감흥하고 위로를 얻는 것도 그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정치도 그랬으면 좋겠다. 선거도 그랬으면 좋겠다. 정치도 바람이기 때문이다. 선거도 바람이기 때문이다. 사회 공동체의 '바람'(hope)을 실현하기 위한 선거에는 순풍이든 역풍이든 '바람'(wind)이 불었고, 그것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기도 했다.
해방과 건국의 바람, 분단과 전쟁의 바람, 독재와 혁명의 바람, 산업화와 민주화의 바람, 정보화와 세계화의 바람이 이땅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민심은 출렁거렸다. 선거도 팔할이 바람이다. 여론을 조장하는 선거일수록 그렇다. 다시 총선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번 4월 총선을 비전도 감동도 바람도 없는 '삼무(三無)선거'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노래 한 소절보다 감흥이 없는 선거 바람아...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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