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실험미술 1세대 곽훈 작가
지난 1월 첫 시집 출간에 이어
내달 베니스비엔날레 기념전 참여
8월 문예회관 원로작가 조망전도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처음 개관한 한국관 전시에 전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줄지어 매달려 하나의 악기가 된 옹기들 앞에서 김영동 선생이 대금 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옹기 옆에 줄지어 앉은 비구니 20여 명의 머리에 이어진 대나무를 통해 공명했다. 곽훈 작가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퍼포먼스 '겁소리-마르코폴로가 가져오지 못한 것'은 동양 철학을 담은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시도로 평가됐다.
#2011년 9월, 수성아트피아 광장에 커다란 흰색 천이 깔렸다. 포클레인 삽에 달린 붓이 먹물을 찍고는 흰 천 위를 거침없이 오갔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함축한 세계 최초의 행위예술 '포클레인 드로잉'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한국 실험미술 1세대로 꼽히는 국내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곽훈(82) 작가. 대구 달성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이화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김구림, 김차섭과 함께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그룹)를 만들어 실험주의 미술운동을 벌였던 것도 이 때다.
1975년 돌연 미국으로 이주해 UCLA 대학원, 캘리포니아주립대 대학원을 졸업했고 전시를 열며 작업 활동을 해오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참여하면서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2021년 제33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5월에는 수성아트피아 개관 특별전에 참여해 '바람의 나라를 위한 강강술래' 설치 퍼포먼스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왔다.
올해는 그에게 더욱 특별한 해다. 올 초 첫 시집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를 펴냈고, 다음달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기념전에 역대 참여 작가 중 한 명으로 출품하며, 오는 8월에는 대구문화예술회관 원로작가 조망전이 예정돼있다.
최근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여든이 넘은 나이가 무색할만큼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꼿꼿한 자세가 돋보였고, 어떤 주제든 박학다식함과 재치가 묻어나오는 말재주를 자랑했다. 때로는 농담을 건네며 환한 미소를, 때로는 진지한 눈빛으로 작업에 대한 철학을 얘기하는 순수함에서 자타공인 영원한 '청년작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최근 출간한 시집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는 60년간 그림을 그리면서 써온 수많은 시 중 일부를 추려 묶어낸 것이다.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지난해 독일 베를린에 갔다가 브란덴부르크 문과 홀로코스트 추모비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 때 쓴 시를 계기로 책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그 때 쓴 시가 시집 마지막에 실린 '브란덴부르그문'이다. '춤이 없는 도시에 비가 내리면/ 창문이 없는 도시에서/ 발에 밟히는 빗소리는 울음으로 들린다/(중략)/과거는 역사가 되고/ 역사는 현실이 되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의 시를 두고 홍일표 시인은 "곽훈 시집에 담긴 작품들은 모두 천연의 시다. 화가의 시선에 포착된 세계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와 독자의 가슴에서 진동한다. 기존의 정형화된 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역동적으로 살아 숨쉬는 원시의 에너지를 질료로 한다"며 극찬한 바 있다.
역동적이고 강렬한 느낌의 회화와 대조적으로 내면으로 파고드는, 잔잔한 울림을 주는 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글을 쓰는 것에 차이가 있냐는 우문에 그는 현답을 내놓았다.
"글쎄요, 생각해본 적 없지만 방식이 다를 뿐 결국 그림이나 시나 의사의 표현 아닌가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겼을 때 그걸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죠. 자고 나면 샘에 물 고이듯 아이디어가 생기는데, 그림이든 시든 발산을 해야해요. 설령 찢어 없애버리더라도. 지금도 계속 시를 쓰고 있으니, 앞으로 또 책을 몇 권이나 더 낼지는 아무도 모르죠."
왜 시집 제목을 '나는 원시인의 아들이다'라고 붙였을까. 그에게서 원시성은 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그림에서도 그에 대한 탐구가 드러난다. 고대 이누이트족의 고래사냥 의식과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의 흔적에서 영감을 얻은 그의 회화 작품 '할라잇(Halaayt)' 연작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와 동경, 그로부터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원시성에 대한 표현이 담겨있다.
작가는 "결국 내가 인간인 이상, 원시성은 내 속에 내재돼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문장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시집 제목을 먼저 붙인 뒤, 그 문장이 나오는 시 '팔'을 다시 손 봐서 시집에 넣었다"고 말했다.
그는 4월에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기념전에서 1995년 개관 당시 선보였던 '겁소리-마르코폴로가 가져오지 못한 것' 작품을 다시 출품한다. 다만 일부 옹기만을 설치하고 비구니 퍼포먼스 없이 김영동 선생의 대금 연주만 있을 예정이다.
그는 "30년 전을 생각하면 무척 힘들었던 것 같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전시를 준비해 시행착오도, 미련도 많았지만 그 과정은 소중했다"며 "작업실 뒤에 쌓아놨던 옹기를 마침 어제 골라서 설치 시뮬레이션 했었다. 도와준 사람들 나이가 채 서른이 안됐는데, 30년 된 작품을 들고 옮기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고 했다.
작가는 오는 8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선보일 원로작가 초대전에도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회고전을 스스로 거부했던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처음으로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
그는 "전시를 참 많이 했는데, 그때 그때의 신작만 보여주다보니 한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 원로작가 초대전은 나의 초기작부터 지금까지의 큰 스펙트럼을 쭉 정리해서 볼 수 있는 기회여서 소중하고 의미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끊임 없이 탐구하고 창작해온 것도 모자라 항상 세상에 없는 것,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그에게 그런 쉼 없는 열정이 대체 어디에서 나오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그러니까 그냥 미친놈처럼 살았어. 포크레인 끌고 그림 그리는 거, 미친놈 아니면 누가 해요? 그런데 새로운 걸 추구하는 게 생활인 예술가는 그렇게 살아야하지 않나요? 신문 기자도 남들이 안쓰는 것 쓰고, 교수들도 아무도 안 쓴 논문 써서 인정 받고, 운동선수도 남들보다 뛰어난 기록으로 메달 받는 것이 꿈인데, 예술가는 더하죠. 앞으로도 미친 것처럼 항상 새로운 걸 찾아 헤매고, 아이디어를 발산해내야하는 게 내 숙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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