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필리핀 거리에서 땅콩을 팔며 살아가는 한 코피노(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 소년을 다룬 유트브 채널이 적지 않은 조회수를 기록한 적이 있다. 화제의 채널은 네티즌 슈퍼쳇 후원으로 빈민촌에 사는 코피노 소년의 일상 생활을 담아냈다. 어머니의 임신과 함께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 소식을 끊었고, 소년은 어머니가 알려준 아버지의 한국 이름만을 또렷한 발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살아가는 코피노는 약 4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대다수의 코피노들은 마닐라, 세부, 퀘존시티, 필리핀 최대 유흥가로 알려진 앙헬레스(팜팡가)에서 빈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혼혈의 핏줄을 외면하고 양육비를 거부하는 코피노의 한국 아버지를 추적한 '배드 파더(Bad father)' 는 한국 아버지의 사진과 신상정보를 공개했고 코피노들의 생존을 위해 코피노 맘들은 한국 법정에서의 소송을 벌이고 있다. 극장가와 연극계에서도 코피노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증가 추세에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귀공자>는 필리핀의 빈민가와 한국을 배경으로 코피노 복싱선수 마르코(강태주 분)와 청부업자 귀공자(김선호 분)의 추격전을 누와르 액션으로 선보였다. 극단 창작집단 여름밤의 연극 <코피노 아이>는 후천성 망막색소변성증에 시달리는 코피노 제니(권지현 분)를 통해 코피노들의 불행한 삶을 악용하는 부조리한 민낯을 고발하고자 한 작품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상실 올해의 신작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의 운명을 나눈 것은 국적, <테디 대디 런>
'테디(TEDDY), 대디(DADDY)'는 동음이어 발음으로 한 사람을 의미한다. 극 중 인물 테디는 마닐라 퀘손 지역과 앙헬레스를 중심으로 테디베어 인형 공장을 차려 막대한 마약을 유통시켜온 마약왕으로 윤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극 중 인물 윤서와 니나의 운명은 같은 핏줄이지만 국적으로 갈라진다. 윤서에게 아빠는 어린 시절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반면 코피노로 태어난 니나에게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한국인 아빠는 그저 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미국에 살게 된 윤서는 16살이 되던 해 아빠를 만나러 필리핀으로 향하고, 아빠와 만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날, 윤서의 아빠가 사라지면서 극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무대는 극 중 장면들이 빠르게 전환될 수 있도록 개방적으로 만들어졌다. 무대 왼쪽으로는 환풍기와 판넬 지붕, 철망으로 만든 문이 자리하여 필리핀 빈민가를 함축하여 표현하고, 그 위로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클럽을 연상케 하는 'OPPA'(오빠)라는 간판이 보인다. 무대 오른쪽에는 속도제한 표지판과 바탕가스 마비니 방향을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 보이고, 그 앞으로는 빌딩과 건물 외벽으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계단식 구조물이 보인다. <테디 대디 런>은 3막 3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많은 장면을 무대에 담아내야 했는데, 막(幕)의 구성을 연극적으로 구조화하기보다, 1-3막까지의 동일한 에피소드를 윤서와 니나의 시점(時點)만 변화시켜 다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1막은 아빠의 핸드폰 메시지를 통해 알게 된 낯선 아이와의 문자로부터 시작되어, 아빠가 사라진 마닐라 퀘존 시티에 위치해 있는 오아시스 콘도 401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니나, 사라진 아빠를 니나와 함께 찾아가는 윤서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어린 시절 아빠의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은 것이 니나라는 사실을 모르고서 말이다. 윤서가 니나의 바이크를 타고 마닐라 도심을 달리며 사채업자 테디에게 쫓기는 아빠를 찾는 과정(오아시스 콘도, 김영창의 집, 마카티 에비뉴에 있는 주유소, 한인타운 비빔밥집, 퀴아포 성당, 니나의 엄마 로즈의 공원묘지, 테디베어 공장, 갱단 아지트와 앙헬레스의 한 빌딩)이 로드무비처럼 속도감 있게 그려진다. 아빠의 친구 김영창(임진구 분) 집에서는 코피노 아이를 두고 있는 이중생활이 탄로 나고, 주유소에서는 빈민가 청소년들에게 강도를 당한다. 도주를 위한 추격전 중 한인 식당 간판을 부수고, 급기야 마약을 생산하는 위장된 테디베어 생산 공장을 거쳐 아빠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앙헬레스까지, 무대는 윤서와 니나의 이동 경로를 영상처럼 시각화한다. 필리핀 도심을 달리는 영상과 내비게이션, 실사(實寫) 이미지로 장면의 배경을 사실감 있게 보여준다. 장면이 전환되면 실사 이미지로 장면의 배경 장소를 알려주는 식이다. 1막에서는 아빠를 찾아가는 과정을 윤서의 시점에서 그리면서도, 그 사이사이 니나의 엄마 로즈의 이야기, 윤서의 아빠에 대한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 윤서와 엄마와 꿈 장면, 성장통을 겪었던 내면의 고백 서사로 채워진다.
2막은 <테디 대디 런>의 극적인 전환점을 도는 구간이다. 1막에서 윤서의 '대디'를 찾는 과정이 그려졌다면, 2막에서는 마약왕 '테디'와 갱단 소속으로 테디를 암살하려고 했던 코피노 니나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윤서와 이복형제인 코피노 니나의 가족사와 출생의 비밀이 드러난다. 작가는 이 지점에서 1막에서 보여준 윤서와 니나의 이동 경로 장면을 역주행하며 장면을 반복하는 구조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윤서의 대디가 곧 테디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마약 밀매 범죄도시를 연상케 하는 장면 분위기로 전환되며, 니나의 시점으로 테디의 숨겨진 삶과 범죄의 비밀들이 드러난다. 실상 킬러인 니나는 테디가 미국에서 자신을 만나러 오는 딸 윤서를 위해 임시로 빌린 콘도로 그를 암살하기 위해 숨어들었던 것이다. 윤서의 아빠인 테디는 윤서의 가족들에게도 신분을 감춘 채 필리핀에서 클럽을 운영하고 마약을 유통해오다 킬러의 표적이 되자 콘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1막의 분위기가 실종된 아빠를 찾아가는 '다큐 드라마'였다면, 2막부터는 누아르 액션이 더해지는 분위기다. 테디베어 공장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퀴아포 성당을 거쳐 테디가 있다는 앙헬레스의 한 빌딩까지 니나와 윤서는 바이크로 달리며 테디가 두 사람의 대디(아빠)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필리핀 엄마를 버리고 떠난 한국인 아빠를 향한 코피노의 증오는 윤서를 통해 변화되고 테디를 향한 니나의 탄환은 앙헬레스 허공을 향하며 테디는 위기를 넘기게 된다. 이어 3막은 니나의 남자친구이자 갱단 일원인 텐(김시유 분)의 바이크를 타고 필리핀 도심을 빠져 나온 니나와 윤서의 내면이 포개지며 윤서는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니까.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몰라" 라는 대사로 끝난다.
◆작가의 설정과 연출 구현 방식의 사이
<테디 대디 런>은 몇 가지 지점에서 작가와 연출적 장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테디 대디 런>을 구성한 작가의 설정 방식이다. 1막과 2막을 동일 장면의 구조를 반복하며 윤서와 니나의 다른 시점을 중첩시켰다. 대사는 대화 방식보다는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으로 1막과 2막을 끌고 가며 인물의 내면을 고백하듯 전달하고 있다. 마치 자신의 내면과 감정 상태를 해설하고 있는 것처럼. 두 번째는 <테디 대디 런>이라는 제목이다. 동일한 아빠를 사이에 두고 삶이 대비되는 윤서와 니나의 출생 관계를 상징적으로 내포할 수 있는 동음이어를 선택한 감각이 재미있다. 여기에 극 중 아빠는 등장하지 않지만, 윤서의 테디베어 인형 언급 대사를 통해 무대 위에 시각화되지 않는 아빠(대디)를 테디로 연결시키고 중의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으로는 어릴 적 우연히 주고 받은 문자의 기억으로부터 2막의 두 사람의 관계를 암시하는 설정이 흥미롭다. 연출은 마치 만화경 같은 무대 구도와 배치, 연기 패턴으로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희곡텍스트를 무대 위에 입체적으로 구현하고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갈등과 사건 중심이 아닌 에피소드 구조를 취하고 있는 <테디 대디 런>의 텍스트 구조 특징을 무대에서 잘 살려낸 것이다. 배우들은 대사와 감정을 동반한 행동으로 장면을 구현하지 않고 대사 전후의 과장된 동작과 제스츄어, 움직임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마치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장면을 이미지화했다. 특히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장면, 주유소 강도 사건, 미국 생활과 엄마(이지현 분)와의 드라이브 장면, 윤서와 엄마의 꿈 속 장면 등이 그러하다.
아쉬운 점은 성장드라마 이상의 극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테디 대디 런>에서는 출생의 비극도, 애절한 사랑도, 증오와 복수도, 테디와 대디를 추적하는 위기의 긴박함도, 필리핀 앙할레스와 코피노의 절박한 현실도 없었다. 마닐라 로드 액션을 표방한 지점은 마닐라 풍경의 잔상으로 대신했다 할 수 있다. 2막의 반복 구조는 장점이자 덫이 되었다. 동일한 사건과 내용이 시점에 따라 변주되었다 해도 지루함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대의 모양내기는 감각적이면서도 두 청소년의 이야기는 공감을 끌어내기에는 작위적이고 피상적이었다. 연극적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연출의 무대 구현 방식이 참신하긴 했지만 연극 공연장에서 기대되는 공감과 시각적 효과가 탄력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쉽다. 창작산실 연극 분야 올해의 신작 공연은 매우 저조한 성적표를 받게 되었는데, 그 중 김수희의 <아들에게>가 공연과 희곡 모두에서 고른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젊은 두 창작자, 이세희가 쓰고 서정완이 연출한 <테디 대디 런>은 다양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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