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벌어지는 윷판 짜기… 여러 이유로 가지 못 하는 '말'들
이들을 움직이는 건 격려와 치료의 말 한마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설 명절에는 집안 곳곳을 정갈하게 하고, 어르신께 세배드리고, 손님맞이 음식을 장만하는 등 부지런히 명절을 지냈다. 세찬 바람에도 밭두렁에서 연을 날리고, 전 부치시는 큰어머니 옆을 지키다가 부스러기를 받아먹기도 했던 기억은 40대 이상 어른들에게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설 명절을 기억하게 해주는 선명한 추억은 윷 놀던 추억이다. 뒷산에서 베어 온 나무를 오랜 시간 동안 적당히 말려 깎은 윷가락을, 한복 곱게 차려입고 어여쁘게 세배드리던 작은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던지던 모습이 선하다. 달력 종이를 조심스레 떼어 잘라서 윷판을 그려두고, 바둑알이나 장기알로 말을 정하던 모습, 군용 모포를 바닥에 착 깔아 윷가락이 타닥, 상쾌한 소리를 내던 기억이 선하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학교의 '윷판 짜기'
하지만 아무리 윷을 잘 던져도, 분위기가 좋아도, 말을 세우는 사람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마음이 틀어진다면 윷판은 순식간에 분열된다. 윷말을 제대로 서지 않는다고 매우 화가 나신 큰아버지가 삼촌에게 말을 던지고, 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윷판을 엎으시던 아버지도 선하다. 모두 정갈하게 세배하고 음식 장만하시며 세뱃돈 두둑이 챙겨주신 정다운 분들이시다. 윷판 앞에서 돌변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요즘의 청소년들이 본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학교는 설 명절이 지나면 윷판을 짠다. 기존에 있던 말들이 대대적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말들이 등장한다. 말을 세우는 역할은 주로 교장, 교감 선생님이 맡으시는데, 이 기간에 관리자들의 머리숱이 하염없이 준다는 것은 교육청의 비공식 기록에 등재돼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사시는 주택에 하수구가 막혔다면 그것은 탈모에 의한 것이리라. 그만큼 판을 짜는 일은 정말이지 어렵다.
여기 30년 차 수학과 '말'은 변호사 학부모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들을 변호하는 바람에 정신의학과 약을 다섯 달 동안 드셨다 하니, 담임에서 제외해야 한다. 저기 20년 차 영어과 '말'은 학부모가 하필 영문과 교수님이라 출제 오류가 있었던 문항이 행정소송까지 갔다 하니, 올해는 평가가 없는 학년에 배치해야 한다. 그 외에도 치매 부모 봉양, 본인 항암 치료, 자녀 돌봄 등의 사유로 말을 놓았으나 가지 않는 말이 허다하다.
◆각종 민원·소송으로 지옥에 빠지는 '말'들
그래도 열심히 윷판을 짠 결과 2월 중순부터는 시범 경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도를 던지면 여기까지, 개를 던지면 저기서 꺾어서 돌기, 모를 던지면 한 번 더! 이렇게 하는 겁니다. 아시겠죠? 말들은 열심히 달려본다. 하지만 열심히 돌다가 '지옥'에 빠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바로 '소송'이다. 여기에서 모든 말들은 멈춘다.
학교는 어른이 아니라 미성년인 자녀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보니, 부모님들이 자녀를 지켜낸다는 명목으로 각종 민원과 소송을 거는 대상이 돼버렸다. 때로는 가정에서 겪는 분을 참지 못해 학교에 전화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들이 너무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않고 달리다가 '지옥'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민원을 제기하는 심정은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만, 이에 따라 발생하는 행정력 낭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는 학교의 업무수행력을 떨어뜨린다. 특히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그렇다. 절차적 정당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다만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서류 1, 서류 1-1, 서류 1-2를 무수히 만들어내는 그 시간에 학생은 누가 돌보는가. 문제의 단순 오류를 행정소송까지 끌고 가면 남아 있는 정기고사는 어떻게 출제하는가. 이런 연유로 요즘은 교사들이 교장, 교감 선생님을 무서워하기보다는 민원과 이어지는 소송을 가장 두려워한다. 우리가 했던 일들이 일종의 '도덕 손상'으로 돌아올 때, 그저 무력감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일의 능률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그 손실은 수업의 질 하락으로 이어진다.
◆가지 않는 말에게 필요한 건 격려의 말 한마디
윷판이 재미있지도 않고 싸움으로만 일관될 때 일가의 친척들이 세배를 오시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손 흔들며 배웅하면 조금 전의 일들을 잊힌다. 상기됐던 얼굴이 식으며 다시 차분한 명절 분위기를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비로소 각자 집으로 평화롭게 헤어질 수 있는 것이리라.
가끔 교사도 사람인지라, 교장실로 학부모가 '민원' 전화가 아니라 다른 용무로 전화를 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지나가던 학생을 잠깐 도와줬는데 '감사' 전화를 걸었다거나, 몇 반 선생님께서 이러이러한 일로 우리 아이를 격려해주셔서 고마워했다며 '격려' 전화를 했다거나 하는 아주 단순한 사연. 그런 전화는 대상자인 교사도 너무 감사하지만, 하루가 멀다고 다짜고짜 욕설인 전화를 받는 것이 일상인 교장 선생님도 정말 뿌듯해하신다. 그러면서 학교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으면 그것만큼 평화로운 명절이 없는 것이다.
우리 교사들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1%의 악성 민원인이 모든 뉴스와 소송을 만드는 것이지, 99%의 학부모들은 학교를 믿고 기다려준다. 그나마 중등 선생님들은 서로의 '도덕 손상'을 치료해주지만, 교실에서 외로이 버티는 초등 선생님들은 격려 전화가 너무나도 절실하실 것 같다. 가지 않는 말에게 필요한 것은 '지옥'의 윷판이 아니라 격려와 치료의 말 한마디이다.
교실전달자(중학교 교사, 연필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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