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운칠기삼'이라 한다. 운이 7할, 재주가 3할이라는 뜻이다. '기'는 인간의 노력이고, '운'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인생은 노력보다 행운 같은 우연이 좌우할까. 우연이란 무엇일까?
이 문제를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 서양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무언가가 생성되는 것을 '자연에 의한 것, 기술에 의한 것, 우연에 의한 것'의 세 가지로 나누었다. 예컨대 '자연에 의한 것'이란 풀씨에서 풀이 나오듯이 같은 종에서 같은 것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기술에 의한 것'이란 집이라는 관념에서 그와 같은 집의 형상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 기술의 경우에서 생성이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운동이다. 그래서 인과의 논리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려운 문제는 바로 '우연'에 의한 생성이었다.
현실에서 보면 대개 원인이 있어 결과 있는 법인데, 우연이란 이런 직감과는 괴리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를 든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마침 연회에 나갔는데, 돈을 빌린 사람을 만나 다행스럽게도 돌려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은 분명히 돈을 돌려받기 위해 연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돈을 돌려받게 된 원인은 연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나가려 한 '의지'였다.
이렇게 원인을 가지고 결과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우연 혹은 행운이라 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체적인 원인과 부수적인 원인을 구별하여 사태를 설명한다. 연회에 나가려 한 '의지'는 연회에 '참석한 것'을 자체적으로 설명해주나 빌려준 돈을 되돌려 받는 데 성공한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우연'(아우트마톤)과 '운'(튀케)을 구별한다. 운은 우연의 하나이며, 인간의 활동에 한정한다. 돈을 돌려받은 것은 우연이자 운이다.
시를 쓰다 보면 어떤 한 구절이 적절하게 떠 오르질 않아 그냥 비워둘 때가 있다. 그 공백에 들어갈 구절은, 의미적으로나 운율적으로나 어떤 충족할 요건이 있다. 가끔 그런 곳에 생각나는 게 없어 대충 써둘 때도 있다. 그곳에 와야 할 구절이 없다면 그대로 갈 수도 있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 정해진 건 없다. 아니, 그것을 그대로 둔 채 다른 곳에 손을 댈 수도 있다. 이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다양한 대체(바꿔치기)들이다.
작품의 부분으로서 요구되는 조건은 시 전체에서 온다. 작품과 별도로 우리들의 고정된 의도가 선행하여 시 한 편의 성립 과정 전체를 제어하고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는 스스로 생성하면서 존재한다. 막연하지만, 무언가가 흘러가면서 작품 속의 구절, 나아가 시 전체를 별도의 것으로 환치하기도 한다. 책이 책을 읽고 술이 술을 마시듯, 글이 글을 쓰면서 생성의 주체마저 '내'가 아닌 '그 무언가'로 대체된다.
이렇듯 의미는 무의미에서 생성된다. 생성된 의미를 그 이전의 단계에 거슬러 올라 동등하고도 풍부하게 설명할 순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운이란 이런 것이다. 만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목적・합리적인 제작 즉 풀씨에서 풀이 돋는 등과 같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원인과 결과가 같은 이름의 것인 '자연에 의한 것, 기술에 의한 것'이라 했다.
의미의 생성에서 그 본질적인 것은 결과를 기다려보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이 어떤 생성인지, 무엇이 어떤 의미가 드러난 것인지는 결과를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임신 중의 아이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는 사실 태어나서 살아봐야 안다. 물론 임신 중의 아이에게 다양한 인과법칙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상정한다 해도, 그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진행되고 있는 생육 과정에선 아직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는 경우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대칭적이지 않다. 발생하는 의미는 그 이전엔 없던 것이라 그것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여기서 무리하게 원인을 찾고자 하면 가령 신의 도움 같은 '신비적 의지'를 상정하게 된다.
결국 의미의 생성에서, 움직이고 있는 여러 요인의 우연적인 결실은, 결과로부터 소급하여서 그 깊은 의미가 비로소 발견된다. 그것은 객관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가능성의 하나였지만, 실현된 다음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다고 이해되고 평가된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처럼 '관점의 생성'인 것이다. 운명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 즉 인간의 지성에 의한 새로운 관점이 생성됨으로써 그 의미를 창의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불운한 처지를 "전생에 죄(업보)가 많아서…"라고 풀이하는 것도, 현재의 결과를 과거로 연결하여 긍정적 의미로 재해석해낸 예이다. 인간사 모두 우연일지 모른다. 문제는 어떤 관점에 서 있는가이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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