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경 교수의 수도원 탐방기]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Heiligenkruez Abbey)

입력 2024-01-11 13:50:47 수정 2024-01-11 19:01:33

홀로 침묵하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젊은 수도승의 열린 공간
1133년 자텔바흐 계곡 개간해 설립…시토 수도원 12명 수도승 이전 시작
18세기 초 삼위일체 기둥 등 만들어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입구에는 조반니 줄리아니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삼위일체 기둥이 사방을 주시하듯 서 있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입구에는 조반니 줄리아니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삼위일체 기둥이 사방을 주시하듯 서 있다.

수도승들은 침묵 속에 살고,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산다. 이들은 사적 소유(所有)에서 자유하고,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세속적 삶을 갈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베네딕트의 수도승적 삶이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은 베네딕트의 규칙을 더 엄격하고, 더 완벽하게 지키는데 헌신한 시토 수도원이다. 이들은 베네딕트 규칙을 철저하게 따랐고, 더 큰 침묵 속에 살아가길 열망했다.

수도원 탐방 내내 첨단 과학의 시대,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 이런 시간을 살아가는 수도승은 누구이고, 수도승적 삶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 화두(話頭)였고 공안(公案)이었다. 정체성 상실의 시대에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자아가 없는 시대에 자아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토 수도승이 된다는 것은 수도원이라는 특별한 장소에 산다는 것이다. 수도승이 된다는 것은 세속적 삶을 떠난다는 것이다. 수도승이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나의 삶의 일부였던 모든 것과 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삶의 관계를 향해 걸어간다. 그 길은 깊은 '침묵' 의 길이고, '홀로' 걸어가는 길과 같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은 1133년 레오폴트 3세의 아들 오토(Otto)의 제안으로 자텔바흐 계곡의 광활한 숲을 개간해 설립되었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은 1133년 레오폴트 3세의 아들 오토(Otto)의 제안으로 자텔바흐 계곡의 광활한 숲을 개간해 설립되었다.

◆ 성 십자가 수도원이라 불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은 비엔나에서 차로 20-30분 거리에 있다. 수도원은 1133년 레오폴트 3세의 아들 오토(Otto)의 제안으로 자텔바흐 계곡의 광활한 숲을 개간해 설립되었다. 처음 시작은 레오폴트의 요청으로 모리몬트의 시토 수도원에서 12명의 수도승이 이주 한 것이었다. 초기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한 속죄에 대한 헌신의 뜻으로 성 십자가(Holy Cross) 수도원이라 불렀다.

성 십자가 유물이 지금도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에 있다. 1182년 레오폴드 5세가 예루살렘 왕 볼드윈 4세에게 받은 선물을 예배당에 전시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물이나 십자가의 유물은 초기교회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의 원천이요, 존경의 대상이었다.

예수님과 관련된 유물은 헤아릴 수 없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장 위대한 유물 가운데 하나가 이곳 수도원에 있다. 중세 사람들은 성인들의 유물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유물에 도움을 받아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물 숭배와 순교자 숭배는 유럽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현상이었다. 유물이 보존된 장소는 순례의 장소, 관광의 장소가 되었다. 순례자들은 유물 앞에서 기도하고, 영혼의 면죄부를 얻기 위해 앞다투어 달려왔다. 2007년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다른 수도원도 아니고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을 방문했다. 교황의 일성이 '거룩한 길'(Via Sacra)의 가장 중요한 지점을 방문하게 돼서 기쁘다고 할 정도였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입구에는 조반니 줄리아니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삼위일체 기둥이 사방을 주시하듯 서 있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입구에는 조반니 줄리아니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삼위일체 기둥이 사방을 주시하듯 서 있다.

◆바로크 양식의 삼위일체 기둥

수도원은 바벤베르크 왕조의 도움으로 재정적으로 풍족했으며, 유럽 각지에 자매 수도원을 설립했다. 1138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츠베틀 수도원을 시작으로 최근 1988년엔 스티펠 수도원, 1990년엔 체코에 비슈브로트 수도원을 재건했다.

그러나 15-16세기 전염병, 홍수, 화재 등으로 수도원은 어려움을 겪었다. 급기야 1529년과 1683년 튀르기예와의 전쟁으로 수도원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하지만 수도원장 클레멘스 새퍼는 수도원을 더 큰 규모로 건설했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전경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전경

수도원에 들어서면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방문자를 압도한다. 수도원 입구에는 조반니 줄리아니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삼위일체 기둥이 사방을 주시하듯 서 있다. 성 요셉 분수는 삼위일체 기둥 맞은 편에 있다. 삼위일체 기둥과 성요셉 기둥은 둘 다 18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삼위일체 기둥을 자세히 보면 성모가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삼위일체 기둥은 성모의 승천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을 향해 날고 싶은 인간의 갈망이 삼위일체 기둥에 새겨진 게 아닐까.

수도원 교회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단순한 창문이 나 있다. 베르나르두스의 건축 정신에 따라 시토 수도원은 원래 종탑도 없고, 창문에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도 없다. 하지만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은 바로크 시대에 이르자 북쪽에 종탑을 추가했다. 수도원 교회는 수도원의 부침과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수도원 교회의 정면과 회중석 그리고 익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이고, 13세기 지은 성가대석은 고딕 양식이다. 수도원 교회는 오스트리아 로마네스크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특별히 성가대석이 있는 13세기 창문은 중세 예술의 극치이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교회내부.성가대석 창문은 중세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교회내부.성가대석 창문은 중세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성가대석 창문은 중세 예술의 극치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의 화려한 창문은 스테인드글라스 문학에 새 장을 열었다. 시토 수도원 창문은 일반적으로 그리사이유(Grisaille) 기법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사용한다. 그리사이유 기법은 회화 기술로, 회색 계열의 색조나 다른 중립적인 색조만을 사용하여 입체적 효과를 창출한다.

시토 수도회는 색채 없는 창문 즉 순수한 시토 수도원적 스테인드글라스를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1134년엔 색채 있는 창문과 형상이 그려진 창문을 금지했다. 베르나르두스의 죽음으로 창문 양식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빈 유리 끈 장식과 식물 문양 정도로만 발전했다.

그러나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창문은 과거 전통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1280년경 지은 회랑은 스테인드글라스의 장식적 요소가 가미되었고, 유리에 조명을 입혔다. 대부분의 조명은 빨간색, 녹색, 파란색 및 흰색 유리로 된 로제트(rosettes)와 팔메트(palmettes)로 구성된 장식으로 채워졌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시토 시도원에서 스테인드글라스 문학의 변천사를 볼 줄은 몰랐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 타자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은 과거 역사에 묻힌 수도원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수도원이다. 매년 10만 명 이상의 각국 수도승과 방문객들이 몰려든다.

이곳에 현재 80여 명의 수도승들이 살고 있고, 매일 성무일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80여 명의 수도승 대부분이 50세 미만의 젊은 수도승들이다. 이들은 현대 유산인 인터넷과 철학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그들은 지금도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지만 삶은 수도원 전통과 수도 규칙을 철저히 따르며 산다. 하일리겐크로이츠는 수도원을 경험하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회랑.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회랑.

수도원을 돌아 나오는데, 한 수도승이 중년의 부인을 부축해 걷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수도승은 그 넓은 수도원 뜰을 다 지날 때까지 그 여인을 부축해 걷고 있었다. 그렇다. 수도승은 자신이 아니라 타자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온통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해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내면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간다. 복종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데 있다. 복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자신의 의지를 드리는 데 있다. 우리가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이미 복종이고 기도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10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어다."

"모든 이들은 복종의 미덕을 아빠스에게 드러낼 뿐 아니라 형제들끼리도 서로 복종할 것이며, 이 복음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베네딕트 규칙 71장)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