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신춘문예 당선작] 허기

입력 2024-01-01 06:00:00 수정 2024-01-01 17:26:25

희곡부문 당선작 / 김물

일러스트 : 손노리 작가
일러스트 : 손노리 작가

◆등장인물

사랑: 15세 여중생, 교복차림

꼬깔: 40대 남자, 덩치에 비해 조금 작은 앞치마를 입었다. 꼬깔을 쓰고 있다.

엄마: 40대 임산부

◆무대

다가구 주택.

왼쪽 거실, 가운데 주방, 오른쪽 화장실이 위치해있다.

거실 뒤로 현관이, 화장실 뒤로 베란다가 위치한다.

사랑, 의자에 올라서서 찬장을 연다. 찬장 안에는 햇반과 통조림이 가득 들어있다. 사랑은 100ℓ 종량제 봉투를 바닥에 두고 통조림을 그 아래로 패대기친다.

사랑 밥 잘 챙겨먹어.

사랑, 종량제 안으로 햇반을 던진다. 스팸을 던진다. 참치캔을 던진다.

사랑 (계속 던지면서) 젖줄이 없어도 아이는 큰단다. 그러나 어딘가 곯아있을 거야.

아이는 큰단다. 아이는 큰단다. 누가 나를 키웠니? 누가 나를 이렇게 키웠니.

사랑, 종량제봉투를 질질 끌고 거실로 나온다.

이어 사람모양 더미 한 개를 질질 끌며 주방에서 화장실로 옮긴 다. 여자모양의 더미. 아빠의 애인이다. 욕조에는 이미 죽은 아빠가 담겨있다. 그 위로 아빠의 애인을 덮는다. 주방에서 화장실 로 생긴 피 자국을 밀대로 닦는다. 무릎을 꿇고 앉아 수건으로 바닥을 박박 닦는다. 자신의 손도 닦는다. 눈물을 손으로 훔치면 얼굴에도 피가 묻는다. 팔등으로 문질러 보지만 번질 뿐이다.

가위로 수건을 조각낸다. 천 자르는 가위소리. 수건조각을 안아 들고 세면대로 간다. 불을 붙인다. 수건이 탈 동안 욕조안의 시 신을 본다. 거울을 본다. 눈가에 핏자국이 번져있다.

사랑 (거울을 보며) 나한테 왜 그러시는데요.

사랑, 수건 타는 불길에 기도한다.

사랑 (눈을 감고 손을 모아 절박하게)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앞으로 안 그럴 테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꿈이잖아요. 제가 나쁜 생각을 많이 해서 그렇잖아요. 이제 안 할게요. 못된 생각 안 할 테니까 제발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제발 저 좀 깨워주세요.

눈을 떠도, 여전히 불은 타오른다. 사람은 죽어있다. 피로 얼룩진 자신이 거울 앞에 서있다. 눈물이 흐르면 눈물자국을 따라 피가 씻긴다. 물을 틀어 손에 묻은 피를 지운다. 얼굴도 씻어낸다. 수건이 타는 불길이 멎는다. 큰 수건재를 모아 변기에 내린다. 물이 역류해 화장실 바닥으로 재가 올라온다. 재를 모아 변기 안으로 다시 집어넣는다. 변기 뚜껑을 닫는다. 변기와 뚜껑 사이를 테이프 칠 한다.

사랑, 식탁 의자에 올라서 화장실 문 네 귀퉁이에 테이프 칠을 한다. 노란색 박스테이프. 테이프 뜯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 번 씩 뒤를 살피면서 초조하게 테이프 칠을 한다. 마치면 의자에서 내려온다. 잘 붙었나 한 발 떨어져 문을 살핀다. 다시 의자에 올 라가 손바닥으로 모서리를 덧 누른다. 후들거리며 의자에서 내 려와 심장을 쥐고 있으면,

초인종 소리.

꼬깔 등장. 몸보다 작은 앞치마를 입고 노란색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젖은 케이크박스를 집게손으로 들고 있다.

꼬깔 501호! 501호! 문 좀 열어봐요. 나 이 아래 401혼데 지금 물이 계속 새. 잠깐 화장실 좀 볼 테니 열어봐요. 오늘 우리 아들 생일인데 물이 새서 촛불이 계속 꺼져! 없나? (쾅쾅쾅쾅) 없어? (쾅쾅쾅쾅)

케이크를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한 손은 전화를, 한 손은 허리춤에.

꼬깔 (통화)집주인 선생님 되시죠? 아니 지금 누수가 심한데, 윗집이 기척이 없어요. 빨리 해결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사는 분들 번호 좀 알 수 없을까요? 이게 4층 건물에 불법으로 증축을 해노니까 지금 문제가 생긴 것 같거든요? 제가 시설병 출신이라 좀 아는데… 아니 바쁘신 거 아는데 바빠도 할 건 하셔야죠.

전화하는 소리. 쿵쿵대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사랑, 소리가 사그라질 때까지 숨죽인다. 쾅하고 아랫집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사랑, 의자를 주방으로 가져간다.

주방, 식탁에는 2인분의 식사가 차려져 있다. 된장찌개, 생선, 갈비찜, 마른 반찬이 여러 종류 놓여있다. 사랑, 서서 밥을 먹는다. 밥그릇을 들고 밥만을 고집스럽게 먹는다. 씹지도 않고 거의 삼키다시피 한 그릇을 해치우고 맞은 편 한 그릇도 급하게 집어 든다. 밥그릇에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갈비찜을 숟가락으로 퍼 먹고 생선은 손으로 잡아 뼈도 바르지 않고 베어 문다. 그러다가 구역질이 올라온다. 급하게 개수대로 뛰어가 게워낸다.

개수대 옆에는 요리책이 놓여있다. 된장찌개 레시피가 적힌 페이지를 덮고 미역국 페이지를 찾는다. 레시피를 소리 내 읽는다.

사랑 마른 미역을 찬물에 불린다. 참기름을 두른 냄비에 약불로 미역을 10분 볶는다. 소고기를 넣고 다시 볶는다. 다싯물은 두 그릇. 국간장 한 스푼. 물은 간 맞춰서 알아서 가감. 부족한 간은 소금으로.

사랑, 미역을 뜯어 물을 받아 불린다.

초인종 소리.

엄마 사랑아. 사랑 아빠.

다시 초인종.

엄마 나 들어갈게.

사랑, 문을 잠그려 뛰어가면 이미 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온다. 바로 앞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랑을 보고 의아한 목소리 로.

엄마 있는데 왜 대답을 안 해?

사랑 못 들었어.

엄마 비켜봐.

사랑 (막아서며) 왜 왔어?

엄마 현관에서 왜이래. 좀 들어가자.

사랑 무슨 일인데.

엄마 (신경질적으로) 말을 하면 네가 알아? 비켜. (둘러보며) 아빠는 아직이야?

사랑 응, 아직...

엄마 (한숨)8시에 온다니까.

엄마, 집을 둘러보다 테이프가 칠해진 화장실을 보고 의아하게 묻는다.

엄마 저게 뭐야?

사랑 (막아서며) 냄새가 나서. 물도 새고. 옥탑이니까. 불법 증축 뭐 그런 걸로 계속 하나 둘씩 문제가 생겨.

엄마 빨리 고쳐야지. 화장실 좀 갈까 했더니.

사랑 1층에 화장실 있어. 술집에 간이로 만들어 논거. 그거 가.

엄마 보자. 어떻길래 문을 저 꼴로 해놔. 엄마가 보고 아빠든 집주인이든 한 마디 해줄게. 화장실을 못 쓰면 생활을 어떻게 해.

엄마가 화장실 쪽으로 가려하는데 사랑이 그런 엄마 팔을 세게 붙잡아 당긴다. 반동으로 손에 있던 가방, 서류, 케이크가 땅에 떨어진다. 엄마, 놀라서 배를 감싸 안는다. 사랑을 본다.

사랑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흥분해서 빠르게)아빠가 이미 확인했어! 주인도 아는데 안 해주는 상황이고. 하지 말라는데 왜 그래!

엄마, 사랑의 머리통을 세게 후려친다. 사랑 그대로 넘어진다.

엄마 이년이! 대가리 컸다고 이게 이제 힘을 쓰네? 엄마 지금 배나온 거 안 보여?

엄마, 넘어진 사랑을 힘껏 걷어찬다. 자신의 배를 둥글리며 심호흡을 한다.

엄마 깜짝 놀랐네.

사랑 (악에 받쳐서)엄마가 쓸 데 없는 짓을 하니까!

사랑, 일어나서 바닥에 떨어진 가방, 서류, 케이크를 주워 엄마 손에 쥐어주며 현관으로 떠다민다.

사랑 가! 가!

엄마 지랄을해라.

사랑 가!


엄마, 어깨를 털며 힘으로 멈춰 선다.

엄마 갈 거야. 네 아빠랑 얘기만 잘 끝만 나면. 어디서 이런 게 나왔을까, 어쩌다 애새끼가 이렇게 컸어! 지 아빠를 빼 닮았네. 너 어디 가서 내 딸이란 말 하지 마! 중 2병 그런 거냐? 나 참 몇 년 새 기지배 성격이 더 나빠졌네.

사랑 겨우 막아놨는데. 해결해줄 것도 아니면서 엄마가 건들려고 하니까! 그냥 신경 꺼. 내 일에 언제부터 그렇게 관심이 있었어?

엄마 (기가차서)말하는 싸가지가, 누굴 닮았니?

사랑 알아서하니까 그냥 가라고. 그런 걸로 자꾸 뭐 해달라 뭐 해달라 그러면 집주인이 재계약을 해줘? 해준대도 다음 계약에 월세를 올릴 수도 있고. 갈 데 없음 엄마가 키워줄래?

엄마 내가 왜.

사랑 그러니까, 그냥 가시라고요!

엄마 월세 걱정을 네가 왜해. 네 아빠가 그런 것까지 얘기 하냐?

사랑 말을 해야 알아? 그냥 들려. 방음이고 뭐고 그런 게 없는 집이니까.

엄마 (사이) 아빠, 여자 데리고 오진 않아? 밤에 자고 가고 그러진 않고?

사랑, 말이 없다.

엄마 빨리 커. 빨리 커서 너도 나가 살아. 드러운 꼴 보지 말고. 돈 벌면 돼. 돈 벌어서 네 인생 살면 돼.

사랑 그러게 나를 왜...!(삼킨다)

엄마 (혀를 찬다)참 좋은 말한다.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다)

손에 든 케이크를 사랑에게 건넨다. 사랑 빤히 쳐다보면.

엄마 누가 앞에 놓고 갔더라.

사랑, 고개를 돌린다.

엄마, 케이크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엄마 (다른 데를 보면서 궁색하게 변명)요즘 정신이 없어. 보다시피 몸이 이래서 여력도 없고. 기프티콘 보내줄게. 있다 바꿔먹어.

사랑 가세요.

엄마 밥은 먹었니? (거실 한 쪽 종량제 보면서)요즘도 햇반에 스팸만 먹어?

사랑 알아서해.

엄마 살이 더 빠진 것 같아. 여자가 너무 말라도 남자가 싫어해.

사랑, 받아치려다 만다.

엄마 요리책 보낸 거 받았지? 초보들 보기 좋게 사진도 많고 순서도 간단하고. 들어가는 재료도 딱 필요한 것만 실어놔서 따라 하기 좋을 거야. 엄마 학교 순애 아줌마 알지. 우리 조리사들 중에서 최고 실력 있는. 순애아줌마가 추천해준 거야. 네 밥은 네가 챙겨야지. 세상이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니고 다 그러고 살아.

엄마, 지갑에서 만원 3장을 꺼낸다. 사랑 손에 쥐어준다.

엄마 엄마가 입덧 때문에 일을 잠깐 쉬어. 복직해서 월급 받으면 그땐 좀 더 챙겨줄게. 밥 잘 챙겨먹고.

사랑, 돈을 꼭 쥔다.

엄마, 사랑의 얼굴과 팔다리 옷을 걷어 여기저기를 살핀다.

엄마 아빠 요즘도 계속 술 먹니?

사랑 늘 같지. 하루에 두병씩. 안 먹으면 잠을 못자니까. 손을 발발 떨면서도. 눈이 노랗고 배가 둥글게 나오는데도 그놈의 술을 아가리에 욱여넣어.

엄마 손도 계속 올리고?

사랑 (짜증)왜 자꾸 그런 걸 물어.

엄마, 지갑에서 만원을 더 꺼내 사랑의 손에 쥐어준다.

엄마 정 안 될 때는 찜질방이라도 가. 그래도 아빠가 깨면 좀 나으니까.

둘, 서먹하게 서 있다.

엄마 갈게.

사랑 (등에대고)나 낳고 미역국은 먹었어?

엄마 (돌아보며)미역국? 왜 갑자기?

사랑 갑자기 궁금해서.

엄마 넌 2주 전에 먹은 급식 기억 나냐? 똑같아. 이미 십 수 년도 더 된 메뉴가 기억날 리가.

사랑 좀 다른 날이잖아.

엄마 (기억하려 애써보면) 그냥 빵 먹었던 것 같기도 하네.

사랑 미역국이 산모한테 좋다던데.

엄마 좋은 건 비싸니까.(감상에 젖은듯하다 현실로 돌아와)그니까 공부해, 기지배야. 니 애미 팔자 안 닮으려면, 너는 공부를 해. 그래서 똑똑한 남자, 손 안 드는 남자 만나. 너 귀한 줄 아는 사람 만나서 좋은 거 비싼 거 누리면서 살아. 널 먹여 살리진 못해도 네가 벌어 논 거 홀딱 벗겨먹는 새끼는 만나지 말란 소리야. 알아야 안 당한다. 알아야 지킬 수 있는 거야.

엄마,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는다. 화장실에서 꼬르륵 물 빠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물 역류하는 소리가 난다. 꿀럭 꿀럭. 막아 논 변기뚜껑이 세라믹에 부딪히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린다. 둘, 화장실 쪽을 본다.

엄마 심하네. 한 번 보자 어느 정돈지.

엄마, 화장실 쪽으로 다가가면 사랑 제지한다. 긴장감 흐르는 음악. 서로 실랑이 한다. 엄마가 이긴다. 화장실 앞에서 테이프를 뜯는데 안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 피 냄새를 맡고 엄마가 헛구역질을 한다. 입을 막고 개수대로 달려가는데 사랑이 토해놓은 음식물들을 보고 더 구토감이 몰려온다. 엄마 급하게 가방을 챙겨 집밖으로 나간다. 고요해지는 집안.

사랑, 2중 잠금장치를 한다. 엄마가 두고 간 서류를 본다. 이혼서류다. 아빠의 서명 하나만을 남겨두고 모든 항목이 채워져 있다. 서류를 갈기갈기 찢는다. 햇반이 든 종량제에 버린다.

사랑, 화장실 앞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한다. 테이프 한 귀퉁이를 떼었다가 붙이기를 반복. 거실 끝에 있던 화이트보드를 가운데로 가져온다.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회전이 되는 화이트보드, 시계초침 소리가 커진다. 조명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면 뒷면의 완성된 계획이 보인다. 화이트보드는 자석재질이다. 오른쪽 모서리에 빨주노초파, 5색의 다트가 붙어있다.

1. 여행 가방에 시체를 넣어 뒷산에 묻는다.

+: 어쩌면 영원히 아무도 모를 수도 있다.

-: 혼자 들기에 무겁고 cctv에 걸릴 확률이 높다.

2. 도망간다.

+: 잘만 숨어 산다면 속죄된 후에 다시 새 삶을 살 수 있다.

-: 도피자금이 없다.

3. 자수한다.

+: 아직 미성년자라 어쩌면 감형이 될 수도 있다.

-: 감형이 되더라도 일단 일정한 형벌을 받게 된다.

4. 이대로 지낸다.

+: 언제가 들킬지도 모르지만 당분간은 벌을 피할 수 있다.

-: 하루하루를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한다.

5. 나도 시체가 된다.

+: 마음이 편안해진다.

-: 죽어야한다.

사랑, 귀퉁이의 다트를 모두 뽑아 1번부터 5번까지 하나씩 맞추며 대사를 한다.

사랑 1번, (알통 만들어보고 가녀린 팔뚝에 도리질 친다) 못 들어, 탈락

2번, (엄마가 주고 간 4만원을 주머니에서 꺼내며) 한 달도 못 버텨. 탈락.

3번, ...탈락.

4번. 보류.

5번, 보류

사랑, 빨간 색의 다트를 손에 쥐고 화장실 앞을 왔다갔다 서성인다. 5번 '-죽어야한다.'에 적중한 빨간 다트를 뽑아 '+마음이 편안해진다'에 옮겨 붙인다.

일러스트 : 손노리 작가
일러스트 : 손노리 작가

낯선 벨소리.

사랑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어두운 거실 바닥 한 쪽에 휴대전화가 번쩍거린다. '내사랑♥'이라고 저장된 발신자. 받으면, 엄마다.

엄마 (소리) 사랑아 엄마 휴대폰 거깄지?

사랑 응. 아까 떨어졌나봐.

엄마 (소리) 좀 가지고 내려와. 몸이 무거워서 5층까지 올라가기 숨차. 넌 맨날 그 계단을 어떻게 오르내리니? 무릎 다 상하겠네.

사랑 문 앞에 내 놀 테니까 가져가. 지금은 내가 좀 그래.

엄마 (소리)뭐가 좀 그래.

사랑 그냥 좀 그래!

엄마 (소리)네가 그러니까 매를 버는 거야. 애가 시키면 고분고분 한 번에 말을 듣는 법이 없어. 야! 나라도 줘 패겠다. 시끄럽고 빨리 가져와. 아니다. 엄마 지금 아저씨랑 같이 있는데 화장실, 아저씨한테 한 번 봐달라고 할게. 됐다, 엄마가 지금 위에 올라 갈 테니까 문 좀 열어놔. 가서 폰도 가져오고, 화장실도 한 번 어떤지 보고….

사랑 됐다니까 왜 그래. 알아서 해결한다니까. 알았어, 휴대폰 갔다 줄테니까 거기 있어요. 어딘데 지금 아래 주차장이지. 거기 있어. 지금 내려가.

사랑, 화장실로 가 테이프를 꾹꾹 누르고 화장실 문에 귀를 대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간헐적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랫집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웅웅대며 바닥을 통해 들려온다. 다시 문간의 테이프를 꾹꾹 누르고 휴대전화를 챙겨 현관을 나선다.

암전.

조명 밝아지면

초인종 소리, 꼬깔이 생크림이 묻은 케이크 칼을 들고 서 있다.

꼬깔 501호! 501호! 안에 있지? 내가 밖에서 집에 불 켜는 거 다 확인 했어. 안에 있는데 왜 대답이 없어! 501호! 501호!

사랑,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에서 등장.

사랑 누구세요?

꼬깔 501호?

사랑 누구신데요?

꼬깔 나 이 아래 401혼데 도대체 왜 이렇게 대답이 없어? 내가 좀 전에 집 불 켜진 것도 다 확인을 했구만.

사랑 무슨 일이신데요.

꼬깔 아니, 우리 집 화장실부터해서 주방, 거실까지 쭉 천장에 물이 줄줄 샌다고. 아나? (허리에 손 올리고 짝다리)내 주부9단 눈치로 봤을 때, 5층 배관 문제 같은 데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 아들 생일이 오늘인데 천장 물 때문에 케이크 초도 못 켜고 주방 쪽도 물이새서 국이며 갈비며 아무것도 안된다니까? (칼 든 거 이제 인지하고)어머 실수.

꼬깔, 앞치마 주머니에서 비닐을 찾아 케이크 칼을 끼운다. 앞치 마 주머니에 넣는다.

사랑 저희도 그것 때문에 지금 화장실을 못 써요. 주인아저씨한테 말했는데 알겠다고 하더니 벌써 일주 째 소식이 없어요. 나중에 아빠한테 한 번 더 말씀드릴게요.

꼬깔 그니까 내가 한 번 보자고. 내가 군대에서 시설병 출신이었다고. 웬만한 것들은 좀 만질 줄 알아. 원래 손재주가 좋기도 하고. 딱 봐도 좀 그래 보이지 않아?(벽 짚고 멋진 표정)

사랑 예...

꼬깔 (촐싹)우리 여보는 돈 버는데 재능이 있고 나는 살림에 재능이 있어서.

사랑 예...

꼬깔 아무튼 한 번 좀 보자고. 배관 파손정도는 내가 확인할 수 있으니까. 정확하게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사진으로 찍어서 주인한테 요구를 해야 돼. 그 양반은 자기가 사는 곳 아니니까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시급한지를 모른다고. 말만해서는 내 장례식 때 수리될 거야.

사랑 지금은... 지금은 곤란해요.

꼬깔 왜.

사랑 사용 중이기도 하고, 못 쓰게 막아놔서.

꼬깔 사용 중인데 못 쓰게 막아놔?

사랑 사용 중에 고장이 나서... 더 못 쓰게 막아 놨다 뭐 그런...

꼬깔 그니까 한 번 좀 보자니까.

사랑 내일요, 내일. 오늘은 안돼요.

고깔 왜! 왜 내일은 되고 오늘은 안 돼!

사랑 오늘은...혼자...기도 하고... 혼자 있는데 누구 들이면 아빠가 엄청 화낼 거예요. 그것도 아저씨를...

꼬깔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사랑 그런 사람...?

꼬깔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면서)개자식.

사랑, 못 본 척 뒤돌아 도어락을 누르고 집으로 들어가려한다.

꼬깔 (무언가를 보고)어!

사랑, 꼬깔을 보면 어느새 꼬깔이 집 현관으로 들어와 있다. 고깔, 현관 안에 놓인 케이크를 집게손가락으로 들어올린다.

꼬깔 내 케이크!

사랑 문 앞에 놓여있었다고...

꼬깔 아, 아까 물 떨어지는 거 보여 줄라고 들고 왔었는데 여기 두고 갔구나. 다시 오니까 없길래 내가 어디서 또 흘렸나 했는데.

꼬깔, 케이크 투명포장 부분으로 안을 살피면 케이크가 다 망가져있다.

사랑 죄송해요. 아까 엄마랑 좀 다투다가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엄마가 제 건줄 알고 가져와서. 저도 오늘 생일이거든요.

꼬깔 (째려보며 케이크 건넨다) 한 마디 할랬는데, 생일이라니까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학생 먹어. 어차피 우리는 하나 더 샀어.

사랑 (받는다) 고맙습니다.

꼬깔 그럼... 들어온 김에 (기회를 노리며 빠르게) 볼일 좀 보자!

꼬깔 화장실로 달려간다, 사랑 막아보지만 꼬깔의 힘과 속도가 더 우세하다. 테이프 벗겨내는 소리. 사랑 꼬깔에게 매달려 막아 보지만 역부족이다.

꼬깔 어우 이게 무슨 냄새야, 탄내랑 피 냄새 같은 게 왜 이리 심해. 학생 생일이라고 폭죽이라도 터트렸어?(웃음)

심장 소리. 두근대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사랑, 갈팡질팡하다 주방으로 가 밥솥 내 솥을 가져온다. 꼬깔, 마지막 테이프를 벗겨내고 화장실 문을 연다. 순간 뒤에서 머리를 가격하는 사랑. 반복해서 머리를 후려친다. 꼬깔 쓰러진다. 여전히 두근대는 심장소리, 심호흡을 할수록 잦아든다. 심장 소리가 조금씩 작아진다.

사랑, 꼬깔을 화장실에서 주방으로 옮긴다. 식탁의자에 꼬깔을 포박한다. 입에도 테이프를 붙인다.

꼬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뜬다. 결박당한 자신의 몸을 한 번, 사랑을 한 번 보고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사랑은 요리를 하느라 꼬깔을 등지고 있다. 꼬깔은 사랑의 등을 보며 대사한다.

꼬깔 음음, 음음음!(뭐야, 풀어줘!)

사랑, 칼질을 하고 있다. 소고기를 네모나게 손질하고 있다.

사랑 시끄럽게 굴지 말아요. 죽이지 않아.

꼬깔 음음음, 음음음!

사랑, 꼬깔의 입에서 테이프를 뗀다.

꼬깔 나한테, 왜이래!

사랑 아저씨 요리 잘해요?

꼬깔 (경계하면서도 은근한 자부심)처자식 안 굶길 정도는 하지.

사랑, 미역을 볶다가 소고기를 볶는다. 꼬깔, 뒤로 묶인 손. 바지 뒷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를 꺼내 감으로 112를 누른다. 통화가 연결된다.

사랑 우리 아빠는 그런 거 못하는 줄 알았거든요. 맨날 햇반이랑 스팸, 참치 같은 거 박스 떼기로 사놓고 구워먹으라고 데워먹으라고 해요, 집에 안 들어오는 날에는 식탁에 오천 원을 두고 가요. 편의점 도시락, 편의점 김밥 사먹으라고. 편의점 밥은 묘하게 느끼해요. 비리고 느끼한 물맛이 나요. 그래서 맨날 토해요. 단무지랑 김치가 뜨끈해져서 물컹물컹 씹히면 맛이 개 같아요, 내 기분도 개 같고. 근데 오늘 내가 집에 들어오니까 밥이 차려져있는 거예요. 아저씨 앞에 있는 그 밥상이요. 우리 아빠가 차린 거. 현관에 구두가 있길래, 엄만 줄 알았어요. 오늘이 내 생일이거든요. 근데 아니었던 거죠. 아빠의 애인이었던 거죠. 그 밥상의 주인공이. 근데 그 언니가 죽어있었어요. 식탁아래에 눈을 부릅뜨고 입을 잔뜩 벌리고 머리맡에는 피가 잔뜩 흘러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 그 표정을 잘 알아요. 우리 집에 있는 여자들은 다 아는 표정이에요. 아빠를 마주하는 표정.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그러나 끝나지 않던, 결국엔 끝나버린 그 표정. 무서웠어요.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질 않아요. 아빠를 찾았어요. 화장실에 있었어요. 내려 와보라고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어요. 조용했어요.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나에게 고함치지 않았어요. 따귀가 날아오지 않았어요. 조용해지기를 바랐는데 이런 조용함이 아니었는데, (돌아보며)아저씨는 모르겠지?

꼬깔 신고를 해야지. 아저씨가 도와줄게.

사랑 아저씨가 왜요?

꼬깔 아저씨는...어른이니까.

사랑 어른이라고 달라요? 우리 엄마도 어른인데요. 엄마한테 말하면 내 책임이라고 할 거야. 내가 맨날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으니까. 악에 받쳐서 아무 말이나 막 했으니까. 속이 시원하냐고 그럴 거예요. 어쩌면 내가 죽였다고 그럴 수도 있어요. 엄마는 나랑 같이 살기 싫으니까. 내가 죽였다고 그럴 것 같아. 맞아. 그냥 나한테 교도소에 가서 살라 그럴 것 같아. 가서 공부하라고. 얼른 크라고.

고기와 미역 볶는 연기가 난다. 참기름 냄새가 주방 가득 퍼진다. 드문드문 소고기의 피비린내가 스친다.

사랑 엄마랑 살지 그러냐 싶죠? 엄마를 찾아간 적도 있었죠. 나는 12살까지 바지에 실수를 했어요. 매일 악몽을 꿨거든요. 저 꼭대기에서 이 아래로 쿵하고 떨어지는 꿈. 산산 조각나는 꿈. 그날도 바지에 실수를 했는데 이번엔 팬티가 갈색인 거예요. 내 분홍색 팬티가. 내가 똥까지 지리는구나, 나는 놀래서 팬티를 버렸어요. 그게 일주 가까이 반복 됐어요. 더 입을 팬티가 없어서 편의점에서 몇 개를 훔치다 걸렸는데 부모님 번호를 대라는 거예요. 엄마 번호는 이미 없는 번호가 돼버렸고 아빠 번호로 연락이 가서 그날 나는 또 엄청 맞았어요. 아빠는 취해서 내 코에서, 입에서 피가 철철 하는데도 나를 계속 밟고 걷어찼어요.

꼬깔 신고를 해야지. 다른 친척은 없고?

사랑, 수돗물과 국간장을 넣어 국을 휘휘 젓는다.

사랑 이러다 죽겠다싶어서 그길로 도망을 나왔어요. 할머니 집으로. 할머니는 괜찮아, 다 괜찮아 질 거야 하면서 밥을 차려줬어요. 따뜻한 김이 나는 밥을. 고소한 밥 냄새가 나는 흰 쌀밥을. 나물 몇 개, 시래기국 하나, 나는 밥을 숟가락 가득 퍼 입안에 욱여넣었어요. 괜찮다는 게 뭔지 몰랐지만 할머니가 안아주던 그 온기에 마음이 가라앉았어요. 할머니는 이모를 통해서 어렵게 엄마를 불렀어요. 엄마는 이미 애인이 있어서 엄마 집에는 갈 수 없었죠. 이모 집에서 하루를 같이 잤어요. 스포츠브라랑 팬티, 생리대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 하나를 손에 쥐어주더라고요. 그길로 나는 다시 아빠 집으로 보내졌어요. 할머니는 얼마 안 있다 돌아가셨고요.

사랑, 갑자기 뒤돌아 꼬깔을 본다. 꼬깔 흠칫 놀라 전화를 다시 주머니 깊숙이 넣는다.

사랑 맛 한 번 볼래요?

꼬깔, 끄덕인다. 사랑, 뜨거운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 호호 불어 먹여준다.

꼬깔 팔아도 되겠다.

사랑, 웃는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사랑 베란다 쪽을 쳐다본다.

사랑 미리 해서 엄마 좀 줄걸. 벌써 갔나?

사랑, 가스 불을 끈다. 베란다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사랑 아직 있다.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

사랑 (크게) 아저씨, 우리 엄마 오면요, 그거 내가 끓였다고, 내 선물이라고, 엄마도 고생 많았다고 좀 전해주세요.

사이렌소리가 가까이서 크게 들린다.

꼬깔 학생, 학생 뭐하려고 그래, 그만해, 그만해 학생!

사랑 아저씨는 내 말 믿어요?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내 탓 아니라고.

꼬깔 나 말고도 다 믿을 거야. 그니까 안 좋은 생각하지 말고 이쪽으로 와 학생.

사랑 그럴까요? 진짜 그럴까?

꼬깔 당연하지. 다 믿지. 학생이 그런 거 아니잖아. 내가 사람을 잘 봐. 딱 보니까 학생은 선해. 자기 피를 묻힐지언정 남의 피 내는 사람은 못돼. 헛소리하는 자식들 아저씨가 다 혼내줄게. 그니까 학생 위험하게 그러지 말고… 어어 국 넘친다 국 넘쳐!

사랑, 주방으로 온다. 가스불은 꺼져있다.

꼬깔 (실눈으로)학생 이름이 사랑이야? 이사랑?

사랑 (교복 왼쪽가슴의 명찰을 흘끗 보고)맞아요. 이사랑. 개 이름 같죠.

꼬깔 사람이름 같은데? 학생이랑 잘 어울려. 사랑아 우리 오늘부터 친구 하는 거야. 아저씨 요 앞에서 분식집 하거든? 배고프면 놀러와. 나 사랑이 같은 친구 많으니까 걔네 소개시켜줄게. 아저씨 음식 기막히게 해. 와서 떡볶이도 먹고, 김밥도 말아줄게. 한 줄 해. 오뎅도 다섯 꼬치씩 먹어. 나 원래 친구한텐 장사 안 하니까 돈은 출입금지야.

사랑 짱이다.

사랑, 다시 베란다로 가려고 하면

꼬깔 (크게)케이크! 그거 내가 맛있는 거 고르고 골라 사온 거야. 사랑이 생일이잖아. 아저씨가 노래불러줄게. 친구들끼리는 노래 불러주고 박수쳐주고 하니까. 초만 불자. 아저씨한테 축하할 기회를 좀 주라.

무시하고 가려다 구겨진 케이크가 눈에 밟힌다. 자신 같다. 찌그러진 케이크를 꺼내 초를 꽂고 불을 붙이는데 성냥이 잘 켜지지 않는다. 가스 불에 불을 받아오는 사랑.

꼬깔 노래에는 박수가 받쳐줘야 되는데 (포박된 손을 보며) 손이.

사랑, 꼬깔의 손을 풀어준다. 둘은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초를 불려는 사랑을 막아서는 꼬깔.

꼬깔 소원 빌어야지.

사랑 소용 없어요.

꼬깔 소용 있어. 믿어봐.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손을 모은다. 한동안 말이 없다. 꼬깔은 그 틈에 자신을 포박하고 있던 매듭을 재빠르게 풀어낸다. 사이렌소리가 멈추고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사랑, 초를 분다.

초인종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웅성거리는 말소리.

꼬깔 열어주자. 아저씨가 옆에 있어줄게. 사랑이랑 아저씨는 친구니까. 친구는 의지하는 거야. 믿어주는 거야. 아저씨가 옆에 있을테니까 가서 열어주고와.

도어락 부수는 소리가 들린다. 사랑, 직접 문을 연다. 어두운 집안에 불빛이 들어온다. 눈이 부시다. 차양을 만든다. 태초의 빛 같다. 구급대원들이 빠르게 화장실로 이동한다. 사랑, 따라서 시선을 옮기면, 꼬깔, 머리에 쓰고 있던 꼬깔을 벗어 사랑에게 씌워준다. 눈을 가리도록 푹 모자를 깊게 씌워준다.

암전.

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