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숙
작은 것이라도 굴곡이 생기면 오류를 일으킨다. 괜찮다 싶다가도 어딘가에 걸리면 그대로 멈춘 채 꼼짝하지 않는다.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여보지만 미세한 엉킴에도 상처투성이다. 습기를 먹는 날엔 갈래갈래 찢겨 회복조차 힘들다.
용지함을 열어 엉킨 종이를 빼내고 상태를 확인 후 다시 인쇄를 누른다. 조금 더 두꺼웠다면 걸림이 덜했을 것을. 얇고 가벼워 곧게 굴러가는 것도 힘들고 때론 들러붙기도 해 내부 센스가 존재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비침이나 번짐도 심하다. 양면으로 인쇄할 땐 한쪽이 물을 먹은 듯 흐느적거려 다음 길을 제대로 걸어올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결국 멀쩡한 종이를 들어내고 결이 좀 더 튼튼한 용지로 바꿔 넣는다.
사람도 인쇄용지처럼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결이 다를 수 있다. 같은 프린터 기계에 종이를 넣어도 무게마다 차이가 있는데 저마다 다른 결로 살아온 사람들은 하물며 오죽할까.
나도 얇은 용지처럼 버겁다는 느낌이 들면 곧장 굴곡이 생기는 날들이 있었다. 결이 얇아 비침과 번짐도 심했다. 밖으로 훤히 드러날 만큼 남에게 속을 보이기도 했고, 안으로 오므라들어 납작하게 눌어붙기도 했다.
밀실에 자주 갇히던 때였다. 이상한 것은 그때마다 나는 간 곳 없고 무성한 눈빛들이 텅 빈 나를 채우고 있었다. 불편한 무게가 들어서는 것을 느끼면서도 내가 없다는 생각을 못 했다.
나와의 거리감이 열 배, 스무 배쯤 있었던 시절이었다. 숱한 눈빛들이 거대한 봉우리라면 나는 그 앞에서 숨죽이는 아이에 불과했다. 원치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삼키는 바람에 걸림도 잦았고 제자리에 멈추는 날도 많았다. 자존감이란 게 하나도 없었다.
열등감 때문이었다. 타고난 결이 얇은데다 남들보다 깨치는 것도 더뎌 자라는 어느 지점쯤 스스로를 모자라고 서툰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미세한 상처도 견디지 못하고, 무엇을 해보겠다고 덤빌 저항이나 욕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이 얇아도 좀처럼 오류가 생기지 않고 왕복을 힘들어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들은 질긴 실로 엮여 있거나 건조되는 과정 중 또렷한 색깔과 무늬를 가졌는지 모른다. 그것이 곧게 굴러가는 힘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촘촘하지도 않고 색깔과 무늬도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안개처럼 모호한 회색이었다. 진작 또렷한 색이나 무늬를 가졌다면 갇히는 일이 덜 했을 것을. 반복되는 엉킴과 걸림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나였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했다. 내 존재를 들여다볼 여유가 더 없었고 색깔도 부피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일상 안으로 나를 욱여넣기만 했다. 얇디얇은 인쇄용지처럼.
'내'가 필요한 일. 그것은 기습이었다. 작은 공장을 운영한 남편의 예기치 못한 실패는 무섭고 생경한 질서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갇혀 있으면 나 혼자 길을 잃는 게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도 길을 잃게 되는 일이었다.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볼품없는 저항이라도 꺼내고 휘둘러야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벽을 오르고 상처 난 곳에 약을 바르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헤어날 수 없다고 여겼다. 두려움이 최고조로 달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무력감에 빠진 내 존재가 바뀌는 지점이기도 했다. 엄마라는 말은 나약하고 게으른 결을 메울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세찬 비바람이 지나가서인지 비침과 번짐도 한풀 꺾이고 엉키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늦게나마 그 지점이 출발선이 되었다. 어느 모퉁이쯤 깊숙이 눌려있던 자아를 맞닥뜨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들여다보았으면 자라는 여러 지점을 거치며 조금씩 여물어갔을 텐데. 무대 곳곳에 다른 사람을 세워놓고 그들이 바른 립스틱이 메말라 가는지, 마스카라가 번지진 않는지, 피부톤이 붉게 달아올라 힘들어하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을 냈다.
톺아보면 수시로 엉키는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법을 몰랐다. 남에게 맞추는 게 습관이 되어 내 안에 두고도 나를 찾지 못했다. 정작 나에게 나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어수선하고 서툰 날이었다.
풍경은 달음박질하듯 흘러가는데 내 시간은 한참이나 더뎠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때쯤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 어떤 무늬를 그리고 싶은지 들어오기 시작한다. 노을이 생길 무렵에야 서툴렀던 시간을 위로받으며 물들일 입구를 서성인다.
단단해지는 일. 이를테면 무수한 시선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나를 앉히는 일. 내 안에 두고도 몰랐던 것을 밖으로 꺼내는 일. 내 식으로 짜인 생김새를 이렇게 저렇게 그려보는 일. 달무리처럼 희미한 둘레라도 무늬를 가지는 일이다. 시간은 그렇게 조금씩 나를 바꾸어 가고 있었다.
처음엔 겉돌았던 지점이 많아 안타깝고 미웠다. 서둘렀으면 좋았을 것을 싶기도 했다. 이제 와 바라보니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생각도 들고, 천천히 다가와 준 마음이 오히려 고맙기도 하다. 거짓 없이 흘러나오는 것들을 마주할 수 있어서.
결이 단단해진다는 것은 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이전에 생긴 굴곡을 다듬고 문지르며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 일이다. 버겁다는 느낌이 들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무늬 하나를 보태어 다시 그리면 되는 것이다.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있을까. 프린터 용지함에 종이를 넣고 고르게 들어갔는지, 들러붙진 않는지 살핀다. 출구를 향해 늦은 인쇄용지 하나가 덜컹대면서도 천천히 제 길을 걸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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