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즈음 TV에 자주 나오는 영화 가운데 하나가 '노팅 힐'(Notting Hill)이다. 톱스타 여배우와 평범한 책방 주인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가 옆구리 시린 계절에 딱이기 때문이리라. 촬영 무대인 런던 포토벨로 마켓은 로맨스를 꿈꾸는 이들로 늘 가득하다.
남자 신데렐라 이야기인 만큼 영화는 상투적인 설정의 연속이다. 얼떨결에 남주인공 가족의 생일 파티에 초대된 여배우의 넋두리부터 그렇다. 가장 불쌍한 인생에게 마지막 브라우니 조각을 양보하자는 제안에 선뜻 자신의 민낯을 낯선 이들 앞에 드러낸다.
그는 10대부터 다이어트하느라 굶주려 왔고, 남자 친구 복이 없어 폭행당하기도 했다고 털어놓는다. 예쁜 얼굴을 가지려 고통스러운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도 고백한다. 나이가 더 들면 한때 유명했던 사람으로만 기억될 것이라며 불안해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십중팔구는 상대를 '관종'(關種)이라 생각할 것이다. 타인의 관심을 끌고 싶은 욕구가 질환 수준이 아니고서야 스스로 치부를 홀라당 들춰낼 리 없다. 행여 정말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하더라도 의심부터 하기 마련이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불쌍한 인생 호소인'들이 넘쳐난다. 화려한 스펙으로 무장한 채 어두운 뒷골목에서 권력을 좇던 무리들이 느닷없이 깨어 있는 양심인 척한다.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누가 봐도 꽃길만 걸어온 이들이 서민 코스프레에 바쁘다.
사법 처리를 앞둔 야당 인사들은 죄다 자신에겐 잘못이 없다며 비(非)사법적 명예 회복을 외친다. 직군 대표라는 본래 역할보다 정치 퇴행에만 앞장선 일부 비례대표들은 반성은커녕 지역구 자리를 기웃거린다. 수오지심(羞惡之心) 따위는 애당초 포기한 부류다.
염치없기는 여당 후보들 역시 마찬가지다. 임기 내내 줄서기에만 급급해 놓고선 "미워도 다시 한번"을 읍소한다. 더불어민주당 초선 4명이 앞다퉈 불출마를 선언하는 동안에도 용퇴 의사를 밝히거나 험지 출마를 선언한 '솔직한' 초선이 아직 한 명도 없다.
가장 가관인 것은 그동안 시련을 많이 겪었다며 출마를 준비 중인 이른바 '올드 보이'들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예비후보 등록까지 마쳤다. 도덕성 논란이 있었거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사면·복권된 인사들마저 정치적 박해 운운하는 모습에 말문이 막힌다.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때만 되면 등장하는 정당들의 혁신위원회, 비상대책위원회에 유권자들의 절망은 깊어진다. 이미 나와 있는 정답을 지키지 않아 사달이 났는데도 모르는 척 또다시 가장무도회를 연다. 자정(自淨) 능력이 없는데 성과가 나올 리 만무하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 결과는 물론 각종 여론조사에서 앞서가는 야당은 그렇다 치고 국민의힘은 더 절박해져야 한다. 총선 패배는 정권 레임덕을 넘어 보수 진영 궤멸의 시작이다. 비대위 얼굴마담에 누구를 앉히느냐는 승부를 뒤집을 카드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해법은 국민 신뢰를 되찾는 것뿐이다. '마탄의 사수에겐 시간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7월 이 지면에 쓴 어쭙잖은 글에서 말한 대로 실수는 있을 수 있다. 마지막 브라우니를 먹으려면 하소연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공정과 상식이란 시대적 사명에 화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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