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할머니가 아들집에 가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했다. 택시를 잡아타기는 했는데 손자가 일러준 아파트 이름이 입안에 뱅뱅 돌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할머니가 말했다. "기사 양반, 전설의 고향 지나서 니미시벌 아파트로 갑시다." 택시 기사의 내공도 보통이 아니었다. 빙그레 웃으며 할머니를 목적지에 안전하게 내려준 것이다. 그곳은 바로 '예술의 전당' 근처에 있는 '리젠시빌 아파트'였다.
아파트 관련 유머의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니미시벌 아파트'일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든 지어낸 이야기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이 유머가 시사하는 함의(含意)이다. 할머니의 일갈이 웅변하는 걸쭉한 저항의 의미이다. 우리말을 능멸하는 괴상망측한 아파트 이름에 대한 적나라한 항변이다. 요즘 우리나라 아파트 명칭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사자성어로 말하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아파트가 고급화될수록 그 이름 또한 국제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니미시벌 아파트'뿐만 아니라, '난닝구 호텔' 뒤에 있는 '불지옥 아파트'를 찾는 할아버지까지 등장하는 것이다. '난닝구'는 '메리어트'이고 '불지옥'은 '푸르지오'이다. 사실 글로벌 코리아의 세계화 국민들도 국적불명의 기괴한 단어들을 짜깁기 해놓은 긴 아파트 이름에는 난감을 표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아파트 명칭은 20자가 넘는다.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1차'. 그 다음이 '동탄시범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와 '영종하늘도시유승한내들스카이스테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소를 적을 때마다 손바닥에 땀에 나고, 사는 곳을 말할 때는 혀에 쥐가 난다. 술 취한 귀가길 택시 안에서 행선지를 묻고 답할 때는 택시 기사나 손님이나 곤욕을 치르기 일쑤이다.
유명 영어학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도 주소를 물으면 발음이 어려운 아파트 이름에 버벅거리기 마련이다. 영문과 대학원을 나왔거나 유럽과 미국으로 해외 유학을 다녀왔거나 이해난망인 우리나라 아파트 이름은 도대체 어떻게 지은 것일까. 아파트 단지 작명에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 대부분 3가지의 요소를 조합해서 아파트 이름을 짓는다고 한다. 즉 '지역명+시공사 브랜드+펫네임'이다.
앞서 소개한 가장 긴 아파트 이름도 분석을 해보면,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가 지역명이고, '대방엘리움'이 시공사 브랜드, '로얄카운티'가 펫네임인 셈이다. 이와관련 네티즌들은 아파트 이름 짓는 법을 원용한 풍자성 아이디어들을 공유하며 키득거리고 있다. 근처에 아무것도 없으면 '더 퍼스트', 산이 있으면 '포레스트', 강이나 호수가 있으면 '리버뷰'나 '레이크뷰'를 붙이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바다나 항구가 있으면 '오션뷰' 또는 '마리나', 계곡이 가까우면 '밸리', 공원 근처이면 '파크뷰' '센트럴파크', 전철역 부근이면 '메트로', 대학(학교) 언저리이면 '에듀타운'이 된다. 이도저도 아니고 노후건물만 있으면 그냥 '시티'라고 하면 된다. 아파트 작명법은 묘지가 보이는 경우에도 명쾌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선산위브' '빈소지움' 'e편한저세상' '묘지뷰 힐스테이트' 정도는 이해할만하다.
'그레이브뷰 베르디움' '래미안 시메티에르' '스카이 부르지오' 등의 이름은 웬만해서는 뜻을 간파하기 어렵다. 오늘 우리는 외국인조차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 이름도 현란한 아파트 공화국 시대를 살고 있다. 더샵디어엘로, 센트레빌, 위브더제니스, 보네르카운티, 하이페리온, 스위첸, 리슈빌, 에버빌 등등. 그나마 '래미안' '뜨란채' '미소지움'은 한자나 한글에 버터를 발라놓은 격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아파트에는 간단한 지역 명칭만 붙였다. 1970년대 이후부터 아파트에 고유한 이름이 등장했다. '개나리' '무지개' '진달래' 등 정감있는 한글 이름도 많았다. 여기에다 건설사 명칭이 그 앞에 또 붙었지만, 그래봐야 6~7자로 부르기에 복잡하지 않았다. 아파트 이름은 2010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늘어졌다. 아파트 회사마다 브랜드를 강조하면서 이른바 '펫네임'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 '펫네임'에 영어도 모자라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등을 천태만상으로 가져다 붙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래야만 아파트가 고급스러워 보이고 잘 팔리기 때문이다. 혀가 꼬이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난삽한 이름의 아파트에 살아야 상류층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의식 덕분이다. 그나마 토착 왜구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나카무라' '와타나베'가 등장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가.
한국 사회를 '아파트 공화국'에 비유한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우리 아파트 문화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것은 도심의 박물관화 경향을 나타내는 서구 여러 나라의 사례와도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탐욕과 특권의식으로 가득한 '자산적 관점'이 아닌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고려한 '사회적 관점'에서 아파트를 바라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한국에서 아파트는 주거 공간과 부동산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아파트는 초등학생부터 통용되는 빈부와 신분 격차의 상징탑이다. 사회적 욕망의 종착역일지도 모른다. 시멘트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이웃과의 교류와 정담은 없다. 닭장처럼 규격화·표준화된 공간에 살면서 재력이 곧 품격임을 묵시적으로 공감할 뿐이다. 그렇게 자랑스런 '아파트 공화국'에 살면서 일등 국민임을 자부한다.
철옹성같은 아파트 단지가 도심의 요지를 점령한 나라에서, 더 고층화·고급화된 아파트를 열망하고 있다. 그럴수록 아파트 이름도 더 길고 난해한 다국적 경향을 띠게 될 것이다.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은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고 했다. 나랏말싸미 기가 막혀도 '니미시벌'이란 격렬한 항변조차 콘크리트 성채에 묻어버린채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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